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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응달의선샤인 Mar 12. 2024

[에필로그] 날것의 무엇인가를 써보고자

정체성이 없는게 정체성일지 몰라.

브런치를 개설한지 퍽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게시물을 올리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브런치를 기웃거려보면 주제도 일관적이고, 다들 어떤 사람인지 글에서 정체성이 묻어나온다. 하지만 나는 브런치를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좀처럼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나는 왜 브런치를 개설해둔걸까. 심지어 항상 사용해온 '선샤인'이라는 닉네임이 아니라 '응달의 선샤인'이라는 이름을 지어두었더라. 오랜만에 로그인을 한터라 랜덤으로 배정되는 닉네임인가 할 정도로 이질적이고 낯설었다. 나는 왜 이토록 공간을 만들어가면서까지 글을 쓰고 싶은걸까.


나는 항상 무언가를 쓰고 있는 직업이다. 그런데도 무엇인가 더 쓰고싶고, 자꾸만 말하고 싶다. 하지만 매일같이 써내는 텍스트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하기만 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변호사니까. 민사소송에서는 소송 대리인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형사 공판에서는 변호인이라고도 불린다. 이 세계에서는 항상 본인(本人)이 아니라 대리인(代理人)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리고 그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무시하기에는 하루 24시간 중 이 세계에 발담그고 있는 시간이 너무나도 길다.


예전에 전공 교수님께서 그런 이야기를 던지신 적이 있다.(아, 나는 참고로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는 않았다.) 매슬로우 욕구 5단계가 있지만, 더 세분화 시키면 사람은 '이야기의 욕구'가 있다고. 그냥 이야기가 좋은거다. 사실은 이걸로 소속감이나, 존경, 자아실현의 욕구따위가 충족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하고싶고 듣고싶은 욕구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말을 배움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해님달님, 헨젤과 그레텔을 듣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 말을 할 수 있게되면 방안에 있는 자신만의 공룡이야기 따위를 지어낸다. 나는 교수님의 이야기도 참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걸 보면 말이다.


그런 맥락일지 모르겠지만 브런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그램에 텍스트를 쓰기에는 조금 고리타분해보이고, 페이스북에 남기기엔 어딘가 내 공간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골라본 것이 브런치였는데 어쩐지 어떤 방향으로 글을 쓸 것인지 이 브런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정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무턱대고 글을 띄워본다. 어쩌면 정체성이 없는게 정체성일지 모르니까.


이 브런치는 나의 이야기의 욕구인 셈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의 이야기의 욕구를 위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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