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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지예 May 29. 2020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아시안’이 되었다

멕시코에서 발견한 나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해


평소에 나는 내 자신이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물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자주 느낀다. 밥 때가 되어 식사 메뉴를 선택할 때(한식 일식 중식 양식 중에 뭐먹을래? 라는 질문을 할 때 - 한식은 빠지지 않는다), 서점에 가서 한국문학 코너부터 찾아 달려갈 때 (나는 한국문학에 엄청난 애정을 가진 독자다)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 의식하는 것 같다. 그치만 ‘아시아인’, ‘동아시아인’이라는 단어는 내가 그 드넓은 집단에 속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졌다. 멕시코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올 한 해 나를 가장 즐겁게 한 일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소설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교보문고에서 주기적으로 쇼핑을 하는 작은 사치를 부리곤 한다. 우연히 그녀의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읽게 되었고, 읽게 되자 마자 다 읽어버렸다. <아메리카나> 역시 좋아하는 음식을 먹듯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아메리카나>에서 나를 놀라게 한 치마만다의 말(정확히는 주인공 이페멜루의 입을 빌려 치마만다가 하는 말)은 ‘나는 나이지리아에 살 때는 단 한번도 흑인인 적이 없었다. 흑인이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미국에 오자 나는 흑인이 되었다’이다. 미국에서 비미국인 흑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건지 정확히 짚어주는 말이다. 


멕시코에 가기 전에는 이 말이 그저 ‘날카로운 통찰’ 정도로만 느껴졌다. 그러나 멕시코에서의 일상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페멜루(치마만다)의 말은 내 삶을 압축한 문장이 되었다. 


교환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내기 위해 멕시코의 과달라하라라는 도시에 정착했다. 하늘은 높고 맑으며,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기대한 모습 그대로였다. 단 하나 예상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멕시코인들(및 서구권에서 온 교환학생들)은 나를 만나자마자 특정한 카테고리에 포함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나’는 ‘개인’이기 이전에 ‘다른 세계(‘otro mundo’에서 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들은 ‘나’를 만난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온 여자애’를 만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경험이 그저 신기했다. 아시아에 계속 있었다면 듣지 않았을 말이기 때문이다. 


<아메리카나>의 이페멜루는 미국에서 영어권 아프리카,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 ‘비미국인 흑인’이 되는 경험을 한다. 나 역시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대만인, 홍콩인 등등이 모두 ‘아시안’이 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멕시코인, 독일인 여자애들과 같은 집에서 살았다. 어느 날 아침에는 독일인 룸메이트들이  나에게 ‘중국, 일본어랑 한국어는 비슷하지 않아? 알파벳도 똑같지 않아? 단어 단위로는 말이 통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소리가 비슷한 단어들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지만, 중국, 일본인 친구들과 각자의 언어로 말이 통하는 경험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부끄럽지만 한자도 정말 기본적인 것이 아니고는 거의 모른다. 내가 ‘세 국가는 모두 다른 알파벳을 쓴다’는 말을 해주었을 때 독일인 친구들의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두 친구는 한 대륙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같은 알파벳을 쓰는 세계에서 왔으니, 당연히 아시아라는 하나의 대륙에서 온 사람들은 같은 문자를 쓸거라 생각한 것이다. 아마 한-중-일 사이 거리감을 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의 간극 정도로 느낀 모양이다. 아무튼 그들에게 아시아는 하나의 세계다. 


하루는 캠퍼스 안에 있는 샐러드 가게에서 주문을 한 후 계산을 하기 위해 내 대학교 학생증을 내밀었다. 비자카드 겸 학생증에는 내 이름, 학교 이름이 써 있다. 직원들은 학생증이 신기했는지 유심히 보더니 ‘중국어는 정말 신기하게 생겼다니까’ ‘아시아 언어는 너무 어렵게 생겼어, 저번에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며칠만에 포기했어’ 등의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웃으면서 ‘나는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고, 우리가 쓰는 글자는 중국어와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고 말했다. 내가 señora라고 부른 계산대 뒤 직원은 ‘중국인이랑 한국인이 뭐가 다른거지!’하며 웃었고, 갑자기 오기가 생긴 나는 ‘멕시코인들이랑 쿠바인, 과테말라인이 다른 만큼 다르죠’라고 말하며 최대한 사람좋게 웃었다. 내가 멕시코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나눈 긴 대화였다. 


Español Avanzado라는 수업에서 사람의 외모를 묘사하는 표현을 배우던 중이었다. 아시아인들의 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고, 선생님은 프레젠테이션 속 길고 쌍꺼풀이 없는 눈 그림을 가리키며 ‘ojos asiáticos(아시안의 눈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라는 표현을 너무 당연하게 말했다. 우선 그 수업을 같이 수강하는 중국인 친구들과 한국인 친구들은 전부 다르게 생긴 눈을 가지고 있었다. Ojos asiáticos가 있다면, ojos europeos(유럽 눈), ojos latinos(라틴아메리카 눈)도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나의 눈에는 유럽인,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눈 생김새가 모두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경제성, 정확히 말하자면 편파적인 경제성을 새삼 느꼈다. 성별, 인종 분류에서 ‘한 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반영한게 언어라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실생활의 예를 하나 더 찾은 것이다. 아무튼 그 수업 시간에 나는 한번 더 ‘아시안’이 되었고, 내 눈은 ojos asiáticos가 되었다.


인종에 성별까지 더해지면 더 생소하고 신비로운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내가 속해 있지만 나에게 조차 신기하게 다가오는 ‘아시아 여성’이라는 그룹의 정체성이다. 누군가를 성별에 관계 없이 ‘아시안’이라고 규정할 때에는 한국, 중국, 일본이 모두 하나의 세계가 된다. 그러나 ‘아시아 여성’에 대해 논할 때는 ‘한국 여성’, ‘중국 여성’, ‘일본 여성’이 각각 다른 하위 그룹에 속하게 되고, 비로소 한, 중, 일은 서로 다른 단위가 된다. 이런 하위 분류가 이루어지는 것은 편리한 비교를 위해서다. 어떤 우버 기사는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하자 ‘한국 여자들은 이래서 중국, 일본 여자들이랑 다르다’, ‘내가 본 한국(또는 중국, 일본) 여자들은 이러이러 했다’ 등의 말을 하며 나름의 분석을 하기 시작했다. 유사한 경험이 그후 두세번 반복되었다. 어쨌든 한, 중, 일 여성들은 ‘아시아 여성’이라는 하나의 대분류 아래 서로서로 비교되는 일이 잦으므로 (서구권의 특정 국가 여성들과 비교되는 일보다 잦으므로) 여전히 ‘아시아’라는 하나의 세계 속에 공존한다. 또 어떤 사람이 일단 한 번 비교를 시작하면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나에게 ‘한국 여성’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게 아니라, 중국, 일본 여성에 관한 이야기까지 굳이 덧붙인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런데 한국 남성, 중국 남성, 일본 남성을 비교하는 이야기는 한번도 듣지 못했는데, 왜 그런걸까?


사람들은 누구나 편리하게 생각하고, 말하고자 한다. 나 역시 그렇다. 가끔은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굳이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일반화의 편안함을 즐긴다. 편리함에 대한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욕구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튀어나오는 일반론도 있다. 따라서 새로운(그러나 결코 새롭지 않은, 태어날 때부터 나와 함께한) 정체성을 인식하게 해 준 사람들을 무작정 비판하려는게 아니다. 모두가 하는, 당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이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고, 내가 그들을 바라볼 때는 어떤 눈으로 보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불쾌함을 느낀 적도 있지만 휘발성 감정이었고, 오히려 신기함, 호기심이 나의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자신을 인종적 소수자로 만드는 사회에서 생활해 본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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