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마음 속엔 다중이가 산다.

feat. 내가 원하는 나와 남이 기대하는 나

by 이문연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와 친한 누군가가 나 이외의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모르는 모습을 보이는 것. 20대가 되고, 30대가 되고 사적인 모임과 공적인 모임을 두루 경험하면서 사람들의 다양한 페르소나를 경험한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으로 내가 그 상황과 상대방에 맞게 보이고 싶은 가면을 쓰는 것이다. 고로 나의 모습은 한 가지가 아니며 내 마음에 드는 얼굴과 상대방이 기대하는 얼굴 사이 그 어디쯤을 택하는 것으로 다양한 페르소나를 탑재하게 된다.



건강한 멘탈을 가지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과 남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의 발란스를 잘 맞춰야 하는데 이게 잘 되지 않을 경우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성향에 맞는 직업이나 관계가 그렇다. 사람들과 자주 만나고 사람들을 응대하는 직업을 가질 경우 사교적이거나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 잘 맞을 확률이 높다. 반대로 무뚝뚝한 표정이 디폴트 값이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직업의 특성상 서로에게 기대하는 분위기에서 거리가 있으므로 오해를 살 확률이 다분하다. 오래도록 교류를 해서 그 사람의 의도나 의중을 안다면 오해하지 않을 일도 그러한 부분까지 알지 못하는 관계 사이에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므로 결국 성향과 맞지 않는 직업은 관계에서의 피로도를 낳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다양한 페르소나를 갈고 닦으며 살아야 한다. 사람과의 만남은 곧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일이며 나라는 사람은 상대방에 따라,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어떤 거리감을 두고 싶으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익숙하지 않을 경우 사람과의 만남 자체가 피로할 수 있고 어떤 가면을 꺼내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는 경우가 있다. 이건 훈련에 의해서만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훈련 자체가 피곤하고 하기 싫다면 인간관계에서 점점 고립(뭐 나쁜 건 아니다. 요즘은 고립되어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므로)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내 안에 다양한 가면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다는 거다. 가족간에서도 부모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형제/자매들에게 보여지는 모습이 다를 수도 있다. 같은 친구들이라 하더라도 언제적 친구이냐에 따라 스탠스는 달라질 수 있다. 직장 분위기에 따라 연차에 따라 교류 기간에 따라 나의 어디까지 보여줄 것이냐가 결정된다. 사람에 따라 어느 누구에게도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아마 그 사람의 삶은 건강한 다중이가 아닌 언제 내 모습을 들킬까 노심초사하는 전전긍긍의 다중이이지 않을까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관계 속에서의 남이 기대하는 나의 모습이 가까울수록 마음은 편안해진다. 과도하게 높거나 과도하게 낮은 기대감은 자아상과의 괴리로 인해 혼란을 불러일으키므로 남이 나에게 그럴 경우 가스라이팅이 되거나 내가 나에게 그럴 경우 자학의 형태로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다중이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는 중심이 나에게 있어야 한다.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A라는 무리에서의 나, B라는 무리에서의 나, SNS 상에서의 나 등등 인간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의 격차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때 멘탈이 건강함을 유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가 나에게 덧 씌워졌을 때 그 이미지가 부정적이며 벗어나고 싶다면 다른 이미지로의 전환밖에는 방법이 없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나로 남이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페르소나)를 커버하는 방법이다. 다중이로 여러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나는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나를 중심으로 약간의 변주를 통해 나를 다르게 보여주는 것일 뿐, 내가 완전히 다른 내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중이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혼란을 느낀다면 내가 원하는 나와 남이 기대하는 나와의 싱크를 맞추려고 노력하면 된다. 싱크의 방향은 당연히 내가 원하는 곳이다. 남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기도 하다면 그 방향은 같은 곳을 향해 있으니 문제가 없다. 남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과 차이가 크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그 기대감에서 빠져 나오거나, 아니면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차이를 유지하던가. 살면서 남이 나에게 기대하는 모습이 내가 원하는 모습이라 착각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착각이 불행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나를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계를 맺으며 사람들과 부대껴 살아가야 한다면 내가 만들어낸 다중이가 괜찮은지 살펴보자. 메인 다중이가 건강할 때 나머지 다중이들이 건강하듯이 메인 다중이가 문제가 있다면 나머지 다중이들도 삐그덕거릴 수 있다.



예전에는 관계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누군가를 보며 혼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가식적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대방에 따라 A라는 사람의 성향이 180도 바뀐다고 해도 이해가 간다. 누구나 선택적으로 나를 보여줄 권리가 있다. 다만 나에게 보여지는 그 사람의 다중이가 그 사람 본연에 가까웠으면 하는 마음이며 나 또한 내가 애정하는(신뢰하는) 사람일 수록 내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다중이를 어떻게 컨트롤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중이의 진폭과 활용이 좁을 수록 순수하고 솔직하게 느껴질 것이고, 진폭과 활용이 클수록 사교적이고 처세에 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본인이 어떤 사람에 가까운지 스스로 판단하고 내 안의 다중이를 잘 활용했으면 한다. 그게 남이 나에게 내리꽂는 기대감에서 건강한 멘탈을 유지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한다.




글쓴이 이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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