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문연 Aug 28. 2017

50가지 사소한 글쓰기(21) 위로

에피소드(1) 위로에 대하여


어쩌다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난 도통 위로하는데는 소질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위로받는 것에 서툴기 때문이다.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현재 내 상황에 대한 감정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해야하는데 그게 참 어렵다. 사실 그 기저에는 내가 처한 상황이나 감정을 굳이 다른 사람에게 말해서 뭐하랴라는 효용성에 대한 의심이 자리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 대한 솔루션이든, 감정이든 결국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나의 몫이기에 굳이 그걸 다른 사람과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위로를 잘 받을 수 있는지 모른다. 위로해줘. 라는 말도 왠지 투정같아 보인다. 


하지만 위로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에, 사람들에게 굉장히 필요한 행위라 생각한다. 사람들은 위로를 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내가 너를 위로해줄 수 있어서 참 좋다.' 도움을 주는 것으로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도 있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건 한 개인에게 뿌듯한 감정을 준다.(물론 일반적인 건 아니다) 게다가 위로를 통해 그 시간만큼은 혼자가 아니라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나를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내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살아가는데 있어 큰 버팀목이 되기도 하다. 


내가 위로를 못한다고 해서 아예 어떤 말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필요한 건 '(1)감정의 평안을 위한 말 + (2)그 일이 재발하지 않을만한 솔루션'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20대의 난 (1)번보다는 (2)번에 초점을 맞춰 반응했었고, (1)번만 필요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30살이 넘어서야 알았다. 지금은 두 가지를 적절히 병행할 수 있지만 난 여전히 (2)번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기에 내가 하는 (1)번의 위로는 내가 느끼기에도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느낌이 난다. 그래도 이제는 타인에게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무턱대고 (2)번을 제안해서는 곤란하다는 사회적 룰?에 의거해 (1)번만 적절히 사용 중이다. 감정에 공감하는 것은 서툴지만 상대방이 원하니까 노력한다.


(1)번의 위로에'만' 익숙한 사람들은 솔루션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나는 상대방이 다시는 그러한 슬픔/위험/문제에 당면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상대방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1)번이 필요한 상대방과 (2)번이 중요한 나 사이에는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으며 이 엇박자를 지혜롭게 맞추기 위해 나는 위로가 필요한 상황에서 나의 욕구를 최대한 자제한다. 머릿 속에 떠오르는 재발 방지 솔루션을 손으로 휘휘 저어 없앤 다음에 상대방의 기분이 지금 어떤지에 집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런 다음 '힘들겠다, 야 완전 재수없다, 그런 사람이 다 있냐, 걱정하지마'라는 위로 사전이 있다면 상위에 랭크될만한 문장을 구사한다. 그렇게 감정을 진정시킨 다음 분위기를 봐서 솔루션을 제안하거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느낌이라면 자제와 매뉴얼로 점철된 위로를 마친다. 


'고통은 해석이다.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앓는 게 아니라 해석된 고통을 앓는다. - 니체'


에피소드(2) 위로를 그만두다. 


내가 위로를 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부류가 있는데 감정의 평안이 오히려 불안해서 세상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는 '습관성 불행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불행할 것 같지 않은 이유로 자신을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드는데 특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행동하지도 않고,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끊임없이 공감과 위로를 갈구하는 그들을 감당할 에너지가 나에게는 없다. 


두번째는 자신의 섬세함을 섬세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까칠한 섬세함의 소유자'이다. 몇 번 해본 결과 나의 위로는 그들의 섬세함을 따라가기엔 너무 부족하다.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 게다가 '위로'자체도 원하지 않는 듯 하다. 그냥 그들은 그들의 섬세한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 주변 사람들을 원망한다. 말해야 알아듣는 나는 말하지 않아도 캐치해주길 바라는 이들의 감정에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아무도 나에게 그들을 위로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니까 위로해야 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위로 그 이면에는 '배 아픈 소리 한다'는 비공감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만의 가시를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냥 그 가시에 대해서 불평하고,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는데 굳이 '그 정도 가시는 괜찮은 거야' 라고 위로했다. 질투라는 알맹이를 의무감으로 포장한 위로였다. 상대방에게는 위로의 효과도 없었고, 내 기분도 별로였다. 속으로는 그들이 투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위로의 말을 건넸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위로를 그만두기로 했다. 진짜 위로하고 싶을 때, 위로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때만 위로를 하자. 어쩌면 그들이 나에게 했던 것들이 진짜 '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위로를 그만두는 것으로 진짜 위로에 한 발짝 더 다가가보련다. 

작가의 이전글 [전자책] 혼자하는 글쓰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