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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Sep 05. 2017

50가지 사소한 글쓰기(22) 목욕탕

옛날엔 그랬었었지

에피소드(1) 옛날엔 그랬었었지


'하나만 낳아 잘 살자' 인구 감소 정책의 하나로 1980년대를 풍미했던 캠페인이다. 언니와 나 그리고 여동생을 거의 연년생으로 낳았던 엄마는 늘 그 시대를 떠올리면 사람을 죄인 취급했다며 흥분을 하곤 하신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옛날 사진 속 우리는 1명 또는 2명이 아닌, 3명이 함께 찍힌 사진에서 리즈美(리즈: 전성기를 뜻하는 신조어)를 풍기곤한다. 그것은 80년대에 딸 셋을 깨끗하게 관리?하고픈 엄마의 바람이 가득 담긴 노력의 결과물이었으니 그 노력의 상당한 퍼센티지를 차지했던 목욕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엄마와 딸 셋이 한 세트였던 우리는 매 주 목욕탕에 다녔다. 지금은 엄마가 뭐하러 그렇게 악착스럽게 씻기고 닦이고 했는지 모르겠다며 말씀을 하시지만 그 덕분에 지금도 정기적으로 때를 밀지 않으면 안 되는 반강제적 깔끄미니스트가 되었다. 그렇게 일요일만 되면 엄마는 딸 셋을 목욕탕에 먼저 보냈다. 아마 엄마는 못 다한 집안일을 하고 오시지 않았을까 하는데 늦잠을 자고 오신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엄마랑 같이 목욕탕에 간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게 딸 셋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아 놓고 때를 불려놓으면 엄마는 나중에 와서 우리의 때를 밀어주셨다. 언니는 엄마가 없는 자리를 대신해 우리를 책임지고는 했는데 중랑구의 그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만되면 다 때 밀러 목욕탕에 오는지 자리 하나 잡는 게 아주 전쟁터(사실 목욕탕도 완전 코딱지만했다)였다. 아참 그래서 언니는 그 전쟁터에서 자리를 사수하랴, 천방지축 우리를 준비(머리 감고, 몸에 비누칠하고 => 온탕에 들어가기 전의 준비과정)시키랴, 본인 씻으랴 늘 화가 가득했다. 하긴, 나랑 2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엄마는 늘 언니를 어른?취급(홀로 너무 똑똑해서 그래. ㅋㅋㅋ)했으니 말도 잘 안 듣는 동생들 데리고 다니느라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을 거다. 그래서 그 때를 생각하면 화에 가득한 언니의 화받이?를 하느라 우리도 피곤하긴 매 한가지였다. 맏이의 책임감을 나눠갖기엔 둘째는 너무 둔했고, 셋째는 너무 약았었다.


에피소드(2) 삼촌은 기분이 어땠을까 


아빠는 8남매의 맏이로 막내 삼촌과는 나이 차이가 띠동갑 이상이 난다. 막내 삼촌 바로 위의 삼촌은 휴가 때 가끔 우리 집에 오곤 했는데 청소년 시절부터 엄마가 봐왔기 때문에 엄마는 삼촌을 대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외모도 배우급이었는데 성품이 착하기 그지없어서(아니면 형수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워서 그랬는지) 군대에서 휴가 나온 20살의 삼촌에게 엄마는 딸 셋의 목욕탕 동행을 명령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삼촌을 추억하는 몇 없는 즐거?운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그 당시의 삼촌에게는 3,000볼트 정도의 멘붕을 시전한 부탁(이라 쓰고 명령이라 읽어볼까)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그렇게 우리는 뭣 모르고 쫄레쫄레 삼촌을 따라 남탕을 방문했다. 사실 80년대, 90년대까지도 초등학교 저학년(한 3,4학년 쯤?)까지는 남탕, 여탕 가리지 않고 들락날락 거렸다. 그 때는 이성에 대한 인식도 별로 크지 않았고, 또 매체의 영향력도 미비했을 때(TV 채널도 아마 3개였나...)라 그런 일이 가능했다. 하여간 삼촌이 살아 계셨다면 그 때의 기억을 좀 더 생생하게 들을 수(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얘기만 나오면 늘 흑역사라고 소리치는 언니를 보며 내가 그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함에 감사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아빠같아 보이지는 않는 어느 청년이 여자 꼬맹이 세 명을 데리고 남탕에 들어가는 모습이라니...그 당혹스러움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런 엄청?난 추억이라도 있는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에피소드(3) 원망과 억울함 사이


늘 정기적으로 목욕탕을 다녔기에 이사를 온 동네에 새로운 목욕탕을 뚫어야 했다. 다행히 집 가까운 곳에 사우나가 있는 목욕탕이 있었고 엄마와 나, 여동생은 목욕탕엘 갔다. 새로운 곳은 모든 것을 처음 해야 한다는 설레임도 있지만 모든 것이 처음이라는 두려움도 늘 동반한다. 이 사건의 시작은 나도 처음이고, 동생도 처음인데 화장실의 위치를 동생에게 물어본 나로부터 출발한다. 뭔가가 궁금할 때는 그 것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터, 아마 그 당시의 나는 여동생이 화장실을 갔다 왔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동생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물어봤고 여동생은 회색 철문(이 때 뭔가 이상함을 직감해야 했는데 동생을 너무 믿었던가, 아니면 목욕탕 화장실 문에 대한 상상이 지나쳤던가)을 가리켰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철문을 열었다. 묵직한 손의 느낌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직시하는데는 3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1초, 2초, 3초. 


내 시력은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슬금슬금 나빠지기 시작해서 중학교 1학년때부터 안경을 썼다. 그래서 목욕탕에는 늘 안경을 벗고 들어가야 했기에 내가 볼 수 있는 건 죄다 흐릿한 광경뿐이었다. 흐릿한 사람들, 흐릿한 글씨 등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여탕에서 짐작하지 못했던 광경은 거의 없었는데 눈 앞의 광경은 새로운 것이었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알았다. 오 마이 갓!!!!!!!!!!! 난 남탕으로 연결된 금단의 문을 열었던 것이었다. 젠장. 왼쪽에 3명, 오른쪽에 3명 양 쪽에 쪼르륵 앉아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거울이 달린 장소였고, 그 문을 열었던 나는 얼결에 난생 처음 얼굴도 모르는 남자 사람(정확히 어른이 몇 명, 아이가 몇 명, 청소년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었다.)들에게 나의 맨 몸을 보인 것이다. 문을 닫고 엄마와 여동생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난 엄마의 위로?의 말을 기대했는데 엄마는 그냥 껄껄 웃어넘겼다. 그런 다음 여동생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여동생도 미안하다는 말 외에 할 말이 더 뭐가 있을까.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당황할 새도 없었는데 원망과 억울한 감정은 엄마와 여동생에게 말하고 난 뒤 찾아왔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 사람들에게 내 맨 몸을 보인 것도 기분 나빠 죽겠는데 그 원인 제공자인 여동생은 별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고, 내 시력때문에 나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들은 내가 그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설령 내가 시력이 좋았다 하더라도 나만 스탠드업인 상황이었기에 확연히 내가 손해보는 상황이다. 그냥 이런 상황이 생긴 것도 짜증나는데 뭔가 상당히 밑진 것 같은 기분에 눈물이 났다. 목욕탕은 대체 그 문을 왜 안 잠궈 놓은거지?라며 컴플레인을 걸 수도 있었으나 컴플레인을 걸 만큼 사회화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나중에 동네를 돌아다니다 내 맨 몸을 본 사람이 아는 체라도 하면 어쩌지?라는 공포가 몰려왔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한 동안 동네의 남자 사람들이 다 신경 쓰였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충격적인 사건에서 내가 배운 가장 큰 교훈은 목욕탕 화장실은 거진 오픈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우리 나라의 저퀄리티의 성교육을 생각하면 그 때 시력이 안 좋았던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만 보여준 건 억울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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