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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문연 Aug 16. 2018

90번째 출판사와 3번째 계약

첫번째 계약한 지 1년하고도 10개월이 지난 뒤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내가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재능이 하나 있는데 그건 


슬럼프가 짧다는 것이다. 


애인도 없는 현실, 내가 아니면 누가 날 일으켜주랴. 책 계약이 무산되었어도 책 출간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출판사를 컨택해보는 것이 나에겐 생산적인 일이었다. 


대신 눈물만 조금 더 닦고. 


일주일 정도를 방바닥과 베프로 지낸 후에 다시 일어섰다. 강남 교보문고였던 것 같다. 스타일 북 보다는 에세이나 인문학, 자기계발 쪽을 돌아봤다. 코드가 맞을 것 같은 책 30권을 선택하여 책 뒤쪽에 있는 출판사의 메일을 메모했다.


기존에 써 놓았던 기획안을 검토하고 30군데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 기획안을 보낸 시간이 오후 5시 10분. 아니나 다를까 9분 후인 19분에 한 출판사로부터 답변이 왔다. 목차나 컨셉이 괜찮으니 원고를 좀 볼 수 있겠냐는 답변이었다. 외출을 했었는지 아니면 메일을 확인 안 했는지 그 다음 날 오전 10시쯤 일부 원고를 보냈고 그 출판사의 대표님은 다음 날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3월의 끝자락이었지만 날씨는 아직 추웠고 출판사 위치는 분당에서 겁나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장애물이 될 쏘냐!


약속 시간에 맞게 사무실에 왔는데 사무실이 잠겨 있는 것이 약간 꺼림칙하긴 했지만 출판사 대표님은 서둘러 오셨고 케니 지보다는 좀 더 굵은 단발 곱슬머리에서 나는 뭔가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계약을 하기 전에 어떤 저자인지 탐색을 하고 책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질문을 하고자 만나자고 한 줄 알았기 때문에 편하게 방문했다. 제본한 책을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하여 리미티드 에디션(제작한 건 모두 다 팔았으므로)으로 내가 한 부 가지고 있던 걸 가지고 갔다. 


사무실이 추웠으므로 사무실에서 오랜 대화를 하진 않았다. 책 내용에 대해 짧게 이야기했고 무엇보다 스타일과 인문학을 접목한 것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출판사에서는 다 빼고 싶어했던 스타일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압축된 


첫 번째 챕터가 바로
이 책의 색깔이라며


바로 계약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기존의 출판사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은 접점을 맞춰가는 느낌이었다면 이 출판사는 같은 곳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보자는 의지가 출판사 대표님의 헤어를 통해 전달되는 듯했다. 그렇게 계약을 하고 대표님과 밥을 먹으러 갔다.


그렇게 세 번째 계약을 하고나니 처음 취업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1년 반 동안의 취업준비 기간은 나에게 엄청난 자존감 하락을 가져다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고 집에 있는 게 지옥이었다. 


그러다 처음 취직(이 또한 두 번의 실패 후)한 곳은 면접을 본 날 출근 여부를 물어보았는데 난 일도 재미있을 것 같고 마음에 들었지만 해본 적이 없는 생소한 분야이기도 했기에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잘 모르는 분야이므로 내일 당장 출근을 해서 일을 해보고 난 뒤 확실히 말씀드려도 되냐고 말이다. 사장님은 그러라고 했고 


3일 정도를 일해본 뒤 정식 사원으로 출근했다. 


내가 원하는 일은 내가 포기하지만 않으면 생각보다 허무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생각을 이 때 했는데 출간 계약 역시 나에게 허무한 기쁨(허무는 10%, 기쁨은 90%)을 안겨주었다. 

    

초보 저자의 한 줄 생각


뭔가를 엄청 까다롭게 고르는 일은 그 과정만큼은 힘들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나에게 더 좋은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일이 틀어질 때마다 '준비를 더 하라는 신(난 무신론자지만)의 계시일거야' 이런 생각을 했는데 나름 꽤 만족스런 합리화(어쩌면 사실)였던 것 같다.



* 이 매거진의 글은 2013년 출간한 ‘스타일, 인문학을 입다’란 책의 3년간의 출간 과정을 담은 에세이(2015년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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