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얼굴, 장면들

2025. 12. 26. 수

by 개미철학가


# 내렸다가 그치고, 불었다가 그치는, 밤의 고요

- 오스카 오쓰지 [이파리를 흔드는 저녁 바람이] 중에서


정해진 휴게시간에 부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열중하는 내가 미련해 보였는지 선생님들이 하나 둘 제 작업대로 다가왔습니다. 휴게시간은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휴식하자는 암묵적 규칙이 있지만 늦깍이 소목수라는 생각에 마음의 조급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쌤. 조금 쉬면서 하세요.”

“선생님 창 밖에 봤어요?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무성하게 자랐어요. 가을이네요.”

“정말이네요. 원섭선생님. 혹시 대구에 있는 수목원에 가보셨어요? 가을에 정말 예쁠텐데...”

고개를 들어 창밖을 봅니다. 완연한 가을입니다.


원장 선생님 말이, 이전에는 이 공간이 PC방 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모든 창문에 암막시트지가 붙여져 있었고, 주차장은 중고등학생들이 담배를 피고 온갖 비행을 저지르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고 해요.

지금의 목공방으로 바뀌기까지,

창에 붙은 시트지를 일일이 떼어내고 심연까지 쌓인 연초들을 비워내며, 철부지 청소년들의 아지트 문화를 지워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그런 말이 오고가던 중 우리 목공방의 막내 선생님이 멋쩍은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고등학교 때 이 근처에 분명히 PC방이 있었는데 그게 여기인지 전혀 눈치 못챘어요. 그때 저도 여기 단골이었는데, 학교 마치면 친구들이랑 일주일에 두 세번은 왔던 것 같아요. 저는 담배는 안피웠어요. 진짜에요.;;”

막내 선생님의 이야기에 모두 한바탕 웃음 바다가 됩니다.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인연, 또 그들과의 이야기가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요. 가끔은 당신에게 미련이 생기다가도 당신이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나이에 나와 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상처가 나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살아온 모든 시간을 망각 속에 던져버릴 수 있는 나이에/ 우리는 서로를 떠나보냈던 거구나/ 하는 안도감에.


잎을 흔드는 저녁바람.

바람이 내렸다가 그치고, 잎이 불었다가 그칩니다.


‘혼자’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음. 그러니까, 보자”에서 시작해서 “이를테면을 거쳐서, 마치 그것은....”을 지나 “비교하자면...”에 이르렀을 때서야 겨우, ‘혼자’라는 말을 이해합니다. 이해하자마자 나는 노트를 펼쳤고, 외로움를 발화한 대가를 치른 긴밤을 빼곡이 기록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전등의 오프 스위치를 눌렀고, 침대에 누웠고, 아마 코를 골며 곯아 떨어졌습니다.


많은 것들이 묘하게 뒤틀리고 흩어져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선명한 방향을 가진 사람들도 길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길은 올바르기에 망가진 시간으로 인한, 나의 쓸쓸함과 외로움를 알리 없겠지요.

나에게는 실체없는, 뭉특해져갈/ 곁을 내어주었던 지난 시간을 견딜 일만 남았습니다.

이상하죠.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을 때 그 마음을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때는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쓰고 바로 찢어 없애버리기도 합니다.

글이라는 매개로 꺼낸 마음은 사라지고, 사라지면 또 살아집니다. 그렇게 또 살아가면 되는 겁니다.


‘곁’ 또는 ‘옆’이라는 음절을 생각합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가장 좋은 자리.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멀거나 가깝거나 하는 지리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면 있어야 할 자리.


가을이 지나간 자리에 곧 겨울이 오겠죠.

사람의 ‘곁’은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처럼은 찾아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임에 향하는 길. 대곡역에서 반월당역까지 나는, 아주 조용히 오래 걸었습니다. 바닥에 흩어진 은행잎을, 내 마음을 다시 쥐어봅니다. 움켜지는게 아니라 겨우 흩어지지 않을 만큼만.

먼저 얼고,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고, 그 사이로 온기가 스며들기 전까지 내일도 글피도 나는 또 걷겠죠. 살아가겠죠.


어느 해, 가을에는 저도 눈 앞에 있는 것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는 시간을 다시 보낼 수 있었으면 기도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