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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미 Nov 22. 2023

여행이 끝난 후엔 뭐가 남나요

feat. 박성호 <은둔형 여행인간>

떠난 직후에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 돌아온 직후는 어땠더라.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 그동안 비웠던 시간들을 채워 넣어야 한다는 부채감. 쉰 만큼 더 빨리 달려가야 한다는 재촉. '한 번 가봤으니 됐지? 이제 정신 차려'라고 등을 떠미는 목소리.


여행이 원래 이런 걸까.


아일랜드 국립공원 깊이 들어갔을 때 인터넷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내 첫 해외여행의 인도자는 종이 지도였음에도 불구하고(대충 보고도 잘만 찾아다녔는데) 어느새 스마트폰에 잔뜩 기대어 살게 된 나는 인터넷이 도와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생소한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정확한 지표를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이게 맞는 길인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스마트폰 지도만 있었다면 설령 조금 돌아가더라도 '아, 지금 옆에 샛길로 들어와 있네 그럼 저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지' 정도는 간단하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책의 발행연도가 궁금했다. 인터넷을 보니 아직도 잘 떠나고, 잘 쓰고 계시던데 혹시 불안감은 없으신지. 책이 발행되고 3년이 지난 지금 확신은 더 확고해졌는지. 아니면 밤공기에 떠도는 생각들에 온몸이 묵직하게 눌리기도 하는지. 이랬더라면 하는 후회가 징그럽게 발가락을 타고 올라오진 않는지.


여행 중에 우연히 알게 된 노래 Anthony Lazaro의 <life could be so simple>을 한참 좋아했었다. 왜 과거형으로 말하냐면 내가 좋아했는지조차 까먹고 있다가 얼마 전에 우연히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제목부터 멜로디, 가사까지 좋지 않은 부분이 없었고 무엇보다 여행의 취지와 딱 맞는다고 생각해 내내 듣고 다녔다. 심플하게 덜어내기. 이제 이 여행이 끝나면 앞으로도 그렇게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왜 노래 제목처럼 살지 못하는 걸까. 아니 정말 그런 사람이 있긴 한 건지. 있다면 만나서 얘기 좀 해보고 싶은 답답한 요즘이다.






그러나 '떠나는 것은'은 어렵다. 떠나기 전까지 쌓여 있는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가 걱정되고, 다녀온 이후에 거세게 몰아칠 냉정한 현실이 두렵다. 사이트를 일일이 비교하며 용납 가능한 가격대의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귀찮고,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인천 공항까지 가는 것도 고민이 된다. 하지만 또 하나 어려운 것은, 떠나서 실제로 '떠났다'라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몸만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떠나는 것이다. 내가 그전까지 무엇을 하고 살았건, 무슨 일이 있었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나는 나에게서 떠났다.'라고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언제나 현재에 충실하고 싶다는 이상적 기대와 다르게, 마음은 '떠나지 않아야 할 때 떠나고, 떠나야 할 때 좀처럼 떠나려 하지 않으려는' 변덕스러운 경향이 있다. 그나마 몸 대신 마음만 떠나는 것은 '언젠가 떠날 것'이란 희망으로 버틸 만하지만, 몸이 떠났음에도 마음이 떠나지 못했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그토록 고대하던 장소에서의 편안한 휴식과 새로운 경험을 누릴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뜻이니까. 더구나 이전의 내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당연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 볼 수도 없다.


마음이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주로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런 녀석들은 대체로 전염성과 증폭성이 강하고 사람을 자조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여행에서는 단연코 최악이라 할 수 있다. 현실적인 태도는 안정된 삶을 갈구하는 한국의 나에게나 필요한 것이지, 적어도 잠시나마 '생존 투쟁의 제약을 벗어난 삶'을 즐기고 싶은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나치면 사사건건 '굳이 왜?'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피곤한 인간의 될 우려가 있고, 어쩌면 일생일대의 추억이 탄생할 순간을 목전에 두고 지갑을 수호하는 수문장이 될 수도 있다.


- #14 나를 떠나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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