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내가 병원으로 돌아왔다. 몸집만 한 캐리어 하나와 함께였다.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올 기약 없이 다른 도시로 가야 했기에 짐이 배로 늘었다. 돌이 되지 않은 아이와 함께라면 더욱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는 다소 얼빠진 표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내가 나를 보면 바로 울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내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아내가 가져온 두 번째 캐리어를 열고 남은 짐을 마저 정리했다.
서둘러 퇴원 절차를 끝내고 병원 건물을 나섰다. 불행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 찾아왔다. 허둥지둥 짐을 싣고 급하게 차를 빼던 찰나에 사이드미러를 주차장 벽에 긁고 만 것이었다.
“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차가 아니라서 익숙하지 않았다고 옹색하게 둘러댈 일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평소답지 않았을 뿐이었다. 가끔 아내가 운전대를 잡을 때면, 나는 조수석 뒤에 앉아 신나게 아내를 핀잔주곤 했다.(아내는 차를 꽤 험하게 몬다.) 차주인 아내로서는 되갚아 줄 기회가 생긴 것인데, 아내는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내를 마주하기 전, 정신을 차리자고 속으로 되뇌던 나였다. 그제야 나조차도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아내가 더 침착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병원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로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우리가 살던 도시가 점차 뒤쪽으로 멀어졌다. 내 아들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도시에는 소아암 치료가 가능한 의료 시설이 전무했다. 도시는 아이가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막 내쫓기는 중이었다.
대구로 가는 내내 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는 내 뒷자리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거울로 보이는 아이의 표정이 평온하기까지 했다. 아이는 자신의 뱃속에 무시무시한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내가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는 양가의 첫 번째이자 유일한 손주였다. 그분들에게 사실을 담담하게 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를 낳아 그들의 삶에 다시없을 기쁨을 안겨드렸다면, 이 참담한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 기쁨을 통째로 앗아가는 가장 잔혹한 불효로 느껴졌다. 우리 가족에게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었다.
세 번째 병원은 집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다. 병원은 도시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쭉 따라가자, 드디어 병원 건물이 보였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 듯한 각각의 건물이 듬성듬성 이어져 있는 외형이 병원의 긴 역사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병원이 세워진 지 100년이 넘었다는 내용의 슬로건이 병원 건물 안팎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병원에는 어린이 병동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린이만 전담하는 인력도 24시간 상시 근무하고 있었다. 병동의 주사실에는 혈관 투영기도 한 대 있었다. 이때 이런 장비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아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첫 입원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다시 입원 절차를 밟고, 침상을 배정받고, 가져온 짐을 풀었다. 정리가 얼추 끝나니 미처 챙겨 오지 못한 물건 몇 가지가 떠올랐다. 나는 병원 1층으로 내려가서 편의점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그러고 혼자 병실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불현듯 머릿속에 무언가가 번뜩했다.
‘아, 학교……!’
학교. 내 직장. 당장 다음 날부터 출근이었다. 그것도 개학. 큰일이었다. 나는 이 중요한 사실을 그제야 인지했다. 그만큼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간 탓이었다. 누가 보아도 나는 출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병동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앉아서 잠시 고민했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교감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네, 부장님. 무슨 일이에요?”
교감 선생님은 늦은 시간임에도 바로 전화를 받았다.
“교감 선생님, 저 내일 출근 못 할 것 같아요.” 나는 대뜸 말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교감 선생님은 당황한 듯 이유를 물었다. 당연했다. 당시 교감 선생님은 관리자가 지녀야 할 업무 능력에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시선과 리더십까지 겸비한 분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업계에서 흔치 않은 관리자였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 자리에 앉아 있더라도, 개학 전날 밤 갑자기 출근하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는다면 냅다 수긍하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소아암’이라는 단어를 어렵게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러자 내 의지와는 반대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었다. 쉬는 날 직장 상사에게 전화해서 울먹이는 30대 남성. 문장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이지만, 그때의 나는 실제로 그런 모습이었다. 교감 선생님은 내가 업무 외에도 많이 의지하던 분이었다. 그녀는 울먹이던 나를 한참이나 위로했다.
나는 당장은 내가 가지고 있는 연가를 모두 사용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부장님, 길게 보면 휴직해야 하지 않을까요?” 교감 선생님이 되물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그해 새로이 개교한 학교였다. 개교 전, 지금은 멀끔한 건물이 흙먼지 날리던 공사판일 때부터 개교 준비 요원으로 겸직했다. 차질 없이 학교 문을 열기 위해 힘을 쏟았고, 이제 겨우 한 학기 무사히 마친 시점이었다.
학교에는 항상 일할 사람이 부족했다. 작년의 흔적을 참고하여 대부분의 업무를 진행하는 보통의 학교와는 달리, 새 학교에서는 모든 업무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개교만으로도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그해 우리 지역 초등학교 중 공모 사업이 가장 많았다. 우리 학교는 누가 뭐래도 당시 우리 지역에서 가장 바쁜 학교였다.
능력이 부칠 만큼 힘들었을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학교는 무난한 모양새로 굴러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누구든 이탈하면 그 자리를 대신할 다른 누군가가 질 부담이 큰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개교 첫해인 탓에 1학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 학급이었다. 따라서 부장도 둘뿐이었고, 나는 그중 하나인 연구부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개교 전부터 쭉 학교 교육과정 운영과 다른 자잘한 업무들을 쏟아질 듯 쌓인 바구니 속 달걀들처럼 아슬아슬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먼저 휴직하겠다고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랬는지, 일에 대한 욕심을 아직 놓지 못해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가뜩이나 힘겨웠던 업무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한다는 죄책감에 짓눌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아들의 목숨보다 일이 더 중요했다거나.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나는 자격 미달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 인생에서 뭐가 더 소중한 것인지. 학교란 고작 우리 가족이 잘 먹고 잘살기 위하여 내가 밥벌이를 하러 다니는 장소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학교와 아이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는 훌륭한 교육자는 아니다. 아니, 설령 그렇다고 쳐도 그게 나에게 내 아들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가치인가? 백번 다시 물어봐도 내 대답은 이백 번 같을 것이다. 절대, 절대 아니다. 그리고 아니어야 한다. 아버지라면. 아무렴, 학교가 어찌 되든 무슨 상관인가 싶다.
당시에는 왜 바로 휴직하겠다고 말하지 못했는지, 지금도 그때의 나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교감 선생님은 그런 나에게 오히려 휴직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녀 또한 세 아이의 엄마였다. 나와 통화를 하면서 부모로서 내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마땅한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학교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아기랑 사모님 잘 돌봐요. 부장님도 힘내야 한다.” 교감 선생님이 이어 말했다.
갑작스레 이탈한 나의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찾는 일은 오롯이 교감 선생님의 몫일 것이었다. 교감 선생님에게 간택된 누군가는 나를 대신해서 몸이 갈려 나갈 것이었고. 여러 사람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이 못내 불편했다. 그러나 휴직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어떤 방향으로 결정을 내리든, 남은 연가를 먼저 소진하기로 했다. 휴직에 대해서는 아내와도 상의해야 했다. 나는 며칠 상황이 어떻게 될지 지켜본 뒤,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입원 첫날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 도시로 오는 차 안에서도 그랬듯이, 아이는 낯선 병실에서도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잦은 이동으로 아이도 많이 지친 것 같았다.
아이가 밤잠에 들자, 드디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눌 틈이 생겼다. 마주한 아내는 마음 놓고 눈물을 터뜨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남 앞에서는 그렇게 울어놓고, 아내 앞에서는 도저히 같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사자끼리 같이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아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거대한 고목처럼 땅에 깊게 뿌리를 박고 버티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다 잘될 거다. 괜찮다…… 자자.” 나는 아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아내를 먼저 재웠다. 아내와 아이는 작은 병상에 퍼즐처럼 꼭 맞게 들어갔다. 나는 둘 다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병실 문을 나섰다. 어디든 걷고 싶었다. 가슴속이 퇴근 무렵의 병원 앞 대로처럼 꽉 막힌 느낌이었다.
지도 앱을 열어 목적지를 찾았다. 병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공원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건을 기념하는 공원이라는 설명이 뒤이었다. 도시의 한가운데서 그보다 더 좋은 산책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전 편의점에서 산 슬리퍼를 질질 끌며 그 공원을 향해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차츰 멀어지자, 억지로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들이 소아암 진단을 받고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 짧은 시간이 억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현실이 지옥이 되고는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아침에 아들이 소아암 판정을 받고, 저녁에 온 가족이 다른 도시로 떠밀려 오게 된 그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 무심하게 나를 비켜 갔다. 아마 그들은 나를 주정뱅이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당시의 나 같은 사람, 성인 남자가 도시 한가운데서 초라한 행색으로 그렇게 많이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제까지 눈물이 나올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할 정도로 오래 울었다.
이윽고 공원의 입구처럼 보이는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뜬금없이 집채만 한 큰 종이 있었다. 나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며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떠올렸다.
‘일단 휴직은 해야 할 것 같고. 아, 대학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아내와 함께 다니던 대학원 휴학도 문제였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의 소아암 치료 그 자체였다.
‘여기서 제대로 된 소아암 치료가 가능할까? 내일이라도 당장 서울로 올라가야 할까?’
머릿속은 금세 의문으로 가득 찼다. 당시의 내 지식과 판단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투성이였다. 이 세상에 우리 아들이 믿을 구석이라곤 나와 아내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믿을 구석은 오직 나 하나였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만 아득할 뿐이었다.
나는 계속 걸었다. 공원의 끝에는 농구장이 있었다. 넓은 간격으로 놓여있는 농구대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아담한 코트 위에서 젊은 남자 둘이 농구를 하고 있었고, 그 뒤로는 큰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농구공이 통통 튀는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사방에 울려 퍼졌다. 림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농구공과 달빛이 교차했다.
나는 오솔길 끝의 벤치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땀이 조금 흘렀고,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슬픔의 깊이와는 별개로 눈물은 유한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더 크게 귓가에 와닿는 듯했다.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성긴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여름밤 하늘은 까맣고, 달은 밝게 빛났다. 무너진 것은 우리 가족의 하늘뿐. 현실의 하늘은 멀쩡히 그대로였다.
보름이었는지, 그날따라 달이 유난히 크고 둥글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