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다시 검사의 늪이었다. 냅다 치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시한 여러 검사에는 이미 전 병원에서 하고 온 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병원은 전 병원에서 가져온 검사 자료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 듯했다. 우리는 하루 종일 여러 층을 오르내리며 다양한 검사실을 전전했다.
검사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왔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이 급한 상황이라고 했다. 바로 다음 날 오전에 시간을 비워서 수술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저녁에 소아외과 교수가 직접 병동으로 왔다. 수술 과정을 설명한 뒤 수술 동의서를 받기 위함이었다. 나와 아내는 나란히 그의 옆에 앉았다. 그는 병동 간호사실의 모니터로 각종 검사 결과 화면을 보여주면서 수술 과정에 관해 설명했다.
수술은 개복 수술로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다. 제거할 수 있는 암 덩어리를 최대한 들어내고, 가슴께에 케모포트라는 장치를 심는다고 했다. 케모포트는 반복적인 약물 주입이나 채혈이 필요한 환자의 피부 아래에 삽입하는 장치였다. 케모포트 삽입은 수술 후 항암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교수는 수술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부작용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가짓수가 꽤 많았는데, 그 결과는 모조리 ‘사망’이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그 이후로 교수가 설명하는 내내 입을 떼지 않았다.
수술 설명이 끝나고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시간이었다. 흙빛으로 변한 우리의 얼굴을 보고 교수가 말했다.
“수술 도중 아이가 사망할 수 있는 경우에 관해 설명을 드렸죠. 그런데 수술하지 않으면 무조건 사망입니다.”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바로 서명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내 아이의 목숨을 걸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부모가 세상에 있기는 할까. 수술 성공률이나 부작용 발생 가능성 같은 숫자 따위에 내 아이의 목숨을 덥석 맡길 수는 없었다. 아내는 여전히 망설였다. 나는 마지못해 펜을 들어 서명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술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이미 가슴이 짓눌리는 듯했다.
아내는 간호사실을 나서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수술 전날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작은 병상과 더 작은 보호자 침대에 세 식구가 어찌저찌 나뉘어 누워서 밤을 보냈다.
디데이는 순식간에 다가왔다. 아이가 어려서 수술이 빠른 순번으로 잡혔다. 아침부터 정신없이 수술을 준비했다. 아이를 혼자 수술실로 보내기 전, 손바닥만 한 환자복을 파란 수술복으로 갈아입혔다. 환자복을 벗기자 뽀얗고 매끄러운 배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누워있는 자태가 마치 백숙 같아서 잠시 웃었다. 그러나 웃음은 곧 메말랐다.
소아외과 교수는 이 조그마한 아이의 배를 갈라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의 흉터 없는 깨끗한 배를 볼 수 있는 순간은 그때가 마지막일 것이었다. 아이는 기저귀를 찬 채로 우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와 아내는 그 순수한 모습을 눈에 담고 또 담았다.
그렇게 아이를 수술실로 보냈다. 수술은 애당초 4시간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나와 아내는 수술실 근처를 떠나지 않고 줄곧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수술실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호자 대기실의 모니터 화면에 아이의 이름과 함께 글자가 새로 뜬 것이 보였다.
‘소아외과, 0세, 수술 대기’
모니터 화면 속의 수술 대상자들은 대부분 초로의 노인이었다. 물론 아예 노인도 많았고, 30~40대도 적지 않았다. 20~30대 정도의 여자도 몇 명 있었는데, 산부인과인 것을 보니 아무래도 출산 쪽일 가능성이 컸다. 그날 수술을 받는 환자 중 우리 아이가 가장 어렸다. 아이는 돌이 되지 않았기에 법적으로 0세였다. 수술 명단에는 아이와 비슷한 또래는커녕, 10대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보호자가 우리 아이의 나이를 보고 안쓰러워하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수술 대기’라는 글자가 ‘수술 중’으로 바뀌었다. 나와 아내는 아들이 무사히 나오기만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무신론자인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온갖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고, 빵을 두어 봉지 사 왔지만 도통 입맛이 돌지 않았다. 수술실에 홀로 누워있을 아이가 계속 떠올랐다. 아이는 오래도록 금식한 뒤 그곳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끼니도 거른 채로 아이의 소식만을 기다렸다.
얼추 몇 시간 정도가 흐르고 대기실 앞쪽의 문이 벌컥 열렸다. 수술실과 연결된 문이었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소아외과 교수였다. 그가 마치 내 기도를 듣고 친히 우리를 찾아온 구원자로 느껴졌다. 우리는 맨 뒷줄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며칠 굶주린 똥개가 흙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발견한 것처럼 그를 향해 달음박칠쳤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그의 입술이 어서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일단 큰 부분은 제거를 했어요.” 교수가 말했다.
“자, 보세요.”
교수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 꺼내면서 말을 이었다. 그가 보여준 사진 속에는 초록색 천이 있었고, 그 위에 축축하고 괴상한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그 물체는 다름 아닌 아들의 배에서 나온 암 덩어리였다. 교수는 둥그런 공 모양처럼 생긴 그놈의 지름이 무려 7cm나 된다고 말했다. 그 정도면 보통 야구공 크기였다.
나는 순간 내 뱃속 어딘가에 지저분한 야구공이 처박혀 있는 상황을 상상했다. 어른의 배에서 나왔다고 해도 믿기 어려운 것을, 어찌 6개월도 채 살지 않은 아이가 여태 뱃속에 저런 험한 것을 품고 살았을까. 아이의 몸통 크기를 생각하면, 그 암 덩어리는 복부 안 공간의 삼분의 일 정도는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여태 먹고 싸고 자며 살아온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나는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교수는 큰 부분은 제거했으나, 아직 자잘한 부분들이 여기저기에 잔존한다고 말했다. 그는 할 수 있는 데까지 조금 더 제거를 해보겠다고 말했다. 우리에게 할지 말지 동의를 구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고는 교수는 서둘러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갔다. ‘가장 큰 덩어리를 제거했으니 조금 안심해도 되는 걸까?’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한참 시간이 흘렀다. 시골의 버스 터미널 대합실처럼 붐비던 보호자 대기실엔 어느새 아내와 나, 단둘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애당초 계획된 4시간이 넉넉하게 지났는데도, 아이의 이름 옆 ‘수술 중’이라는 글자는 바뀔 낌새는 없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같이 세차게 뛰었고, 두 다리는 모터가 달린 듯 위아래로 달달거렸다. 옆을 보니 아내도 나와 비슷한 처지였다. 서로 괜찮을 거라고 다독였지만, 몸뚱이는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나 아니면 아내, 운이 나쁘다면 둘 다 수술실에 실려 갈 노릇이었다.
이젠 정말 못 버티겠다 싶은 참이었다. 다시 대기실 앞쪽 문이 벌컥 열렸다. 대기실엔 우리뿐이니 우리를 찾아온 사람이 분명했다. 우리의 구원자, 소아외과 교수였다. 드디어 수술이 끝났다고 말하러 온 것일 터였다.
수술은 장장 6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6시간보다는 7시간에 가까웠다. 대수술이었다. 아이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그 7시간이 나와 아내의 인생에서 가장 긴 7시간이었다.
나는 다시 똥개가 되었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를 다시 마주하자, 내 두 앞발이 공손하게 포개어졌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두려웠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교수는 ‘일단’ 수술은 잘 끝났다고 말했다.(그 와중에 ‘일단’이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그러면서 수술 도중 아들의 왼쪽 신장으로 이어진 혈관이 조금 손상되었다고 덧붙였다. 그 때문에 왼쪽 신장이 기능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지. 문제가 있었구나.’라고 잠시 걱정했지만, 이내 교수의 다음 말에 집중했다. 그때는 신장 하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아이의 생존. 그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아이는 수많은 사망 가능한 경우의 수를 용감하게 이겨내고, 장장 7시간 만에 우리 부부 곁으로 살아 돌아왔다. 비로소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교수는 곧 수술 회복실에서 아이를 볼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가 떠나고 조금 더 기다리자, 다른 의료진으로부터 수술 회복실로 들어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수술 회복실에는 보호자 한 명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아내가 들어간다면, 아이 상태는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눈물만 흘릴 것이 뻔했다. 나는 의료진에게 내가 아이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보호자 대기실을 나섰다. 의료진이 건넨 파란색 천을 뒤집어쓰고 신발을 바꾸어 신었다. 진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나는 수술 회복실 문이 열리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수술 회복실 문이 열리자, 멀리 아이가 누워있는 것이 바로 보였다. 나는 마치 그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듯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내를 대신하여 간 이유가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아이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 마취가 완전히 깨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이의 코와 목, 배에 줄 같은 것이 여러 개 끼워져 있었고, 온몸에는 정체불명의 의료 기기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나는 아이가 누워있는 침상 난간을 붙잡고 펑펑 울어버렸다. 우는 것을 들킨 적은 있지만, 여태 아내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 앞에서 대놓고 운 적은 없었다. 부끄러울 겨를이 없었다. 아이가 살아 돌아온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에.
수술에 참여한 의료진은 아이 곁에 붙어 서서 이것저것 처치했다. 그들은 나를 위로하며 한두 마디 말을 건넸다. 그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위로하던 의료진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버님, 저희 병원 마취과 교수님 아이도 같은 병이었어요. 잘 치료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눈물, 콧물 범벅인 와중에도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우리 아들만 이 몹쓸 병에 걸린 것은 아니었구나. 심지어 대학 병원 교수의 아이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라니. 우리 아들도 그 아이처럼 잘 치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나중에서야 그 교수의 아이는 부모가 일하는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지, 아니면 서울의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지가 궁금해졌다. 지금의 나로서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는 일이다.)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연신 아들을 살려주셔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다.
수술을 집도한 소아외과 교수는 수술을 마친 아이 컨디션이 나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고 수술 시간이 길었으니, 중환자실에서 며칠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아이는 외과 집중치료실로 옮겨졌다.(요즘은 ‘중환자실’ 대신 ‘집중치료실’이라는 명칭을 주로 쓰는 듯했다.) 어린이병원은 그 병원의 분원에 설치되어 있어서, 본원인 그 병원에는 소아 집중치료실이 없었다. 외과 집중치료실의 연령대는 노인부터 아이까지 다양했다. 불현듯 두 번째 병원의 병실이 떠올랐다. 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다시 아이와 노인과 우리 아들. 심지어 이번에는 우리 아이가 큰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우리는 호텔에 놀러 간 것이 아니었다.
아들은 대수술을 이겨낸 첫날,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쉰 목소리로 밤새 끙끙 앓으며 다음 날까지 꼬박 하루를 잠만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