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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명랑 Sep 05. 2024

방년 48세 비만소녀 탈출기 15

제15화 가스라이팅 

폭풍우같던 주말이 지나고, 다시 회사에서의 전쟁이 시작이다. 매일 아침 기상과 더불어 나는 마치 의례처럼 몸무게를 잰다. 매번 작은 액정에 떠오르는 거대한 숫자를 보는 게 심리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계속 몸무게 체크를 해야 그나마 살이 왕창 찌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예상하긴 했지만, 주말 동안의 음주와 피로로 인해 몸무게가 2킬로가 늘었다. 속상해도 이미 엎질어진 물, 어쩔 수 없었다. 다이어트 약은 생각보다 별로 효과가 없다. 광고에서는 세 끼 식사를 다 해도 쫙쫙 빠진다고 했지만, 나는 하루 한 끼 식사만 하는데도 빠지기는커녕 기껏해야 현상 유지 정도다. 결국 다른 것을 병행해야만 하는 걸까. 


당분간 야채식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침에 당근과 오이, 그리고 파프리카를 길죽하게 썰어 플라스틱 통에 담았다. 회사 사람들의 잔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하다. 홍 부장은 분명히 “어머, 이 팀장, 이제 본격적으로 다이어트 하려나 보네? 그런데 아무리 다이어트에 좋다고 해도, 난 그렇게 맛없는 식사는 못하겠더라”라고 재잘거릴 것이다. 밥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표는 왜 밥을 안 먹냐고 나무라거나, 어떻게든 날 데리고 가려고 할지도 모른다. 


먹고 안먹는 것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이 나라다. 왜들 그렇게 남이 먹는 것에 관심이 많은지. 가난해서 끼니를 제대로 챙겨먹을 수 없었던 과거 역사 때문일까? 인사부터가 “식사 하셨어요?”다. 그뿐인가. 밥 한 끼 안 먹으면 “그렇게 안 드시면 몸 상해요”라는 말을 듣기 일쑤이고, 적게 먹으면 “어디 편찮으세요?”라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름 상대방을 돌보고 배려하는 마음 때문이겠지만, 나로서는 영 불편한 게 아니다. 


예상했던대로 모든 사람들의 ‘잔소리’를 들은 뒤, 가방에서 야채를 꺼내 식사를 하려는 찰나였다. 외근 나갔던 아람이가 들어오더니, “어, 팀장님 계셨네요?”라고 인사를 한다. 아람이는 우리 회사에서 회계 일을 맡고 있는데, 자그마한 키에 통통한 몸집, 흰 피부에 동글동글한 얼굴이 아주 귀여운 친구이다. 말이 많지 않고 조용한 친구지만, 일처리가 꼼꼼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들어오는 표정이 별로 좋지가 않다. 뭔 일이 있나… 내 자리에서 아삭아삭 야채를 씹어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더니 아람이가 다른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내가 청력이 좋아서인지 아람이의 전화 내용을 다 듣고 말았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냐,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렇게 화내진 말아.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외근 나가서 그쪽 직원과 이야기하느라고 바로 답 못한 거야. 아냐, 네가 더 중요하지. 나한테 네가 제일 중요하다는 건 네가 더 잘 알잖아…. 내가 다음부터는 더 잘할게. 면접 준비때문에 예민할 수 있는데 내가 더 신경쓰지 못해 미안해…. 그리고 내가 너 입으라고 셔츠 하나 새로 주문해놨어…. 응, 그거 네가 지난 번에 말했던 그 브랜드야. 물론이지. 네가 그런 거 신경쓰는 거 잘 알아….”


전화를 한 20분은 했나…. 방에서 나오는 아람이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있다. 뭐라고 한 마디 물을까 하다가 아람이가 원치 않을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아람이는 자기 자리로 가더니 엎드려 있다. 울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나…. 내버려두는 게 나을지, 뭐라고 말이라도 건네야 할지 망설여진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람이. 아삭아삭 야채를 씹어먹고 있는 나를 향해 말을 건넨다. “팀장님, 저 뭐 하나 상의드려도 돼요?”

곧 사람들이 돌아올 시간이라, 우리는 길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상황은 불보듯 빤했다. 아람이에게 남자 친구가 있는데, 오늘 외근 나갔다가 전화를 제때 받지 못했다고 남자 친구가 뭐라고 한 모양이었다. 오늘 뿐 아니라 남자 친구는 사사건건 아람이에게 화를 내고 비난을 한다고 했다. “너같은 애를 내가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가 그 친구의 일상 표현이었다. 아람이에게 일부러 죄책감을 심어준달까. 끊임없이 아람이에게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끌어내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야 이야기를 마치는 아주 악질적이고도 폭력적인 타입이었다. 당연히 아람이는 남자 친구 때문에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사귄 지 2년 반이 흘렀고,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했다. 아람이는 남자 친구를 아주 좋아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탓으로 돌렸다. 나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다 제가 잘 못해서 그래요”라며 스스로를 비난했다.


“사실, 저는 두려워요.”

“뭐가 두려운데?”

“이 친구랑 사귄 것도 정말 힘들게 사귀기 시작한 거거든요. 헤어지면 다른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것만 같아요.”

“왜 다른 사람을 못 만나?”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저처럼 뚱뚱한 여자를 누가 좋아해요.”

“남자들이 뚱뚱한 여자를 안 좋아하는 건 나도 알아. 내가 하루이틀 겪어봤겠어? 하지만 그 두려움 때문에 남자 친구한테 질질 끌려다니는 거야? 맨날 잘못했다고 빌기나 하고?”

“저는 남자 친구 없이 못 살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너무 좋아하고요. 그리고… 뚱뚱한 여자가 남자 친구조차 없으면, 얼마나 비참한 지 아시잖아요.”

“......” 

“이 친구는 절 사랑해요. 저보고 예쁘다고 해줘요. 누가 저보고 예쁘다고 하겠어요?”

“그렇구나…. 나한텐 아람씨는 예쁘고 귀여워 보이는데….”

“제 남자 친구는 완전히 애기에요. 제가 다 해줘야 해요. 게다가 지금 새로운 회사로 이직하려고 면접 준비 중이거든요. 얼마나 예민한지. 이해는 하지만, 저한테 매일같이 쏟는 말들이 너무 상처가 돼요.”


뚱뚱한 여자는 남자에게 훨씬 더 헌신해야만 겨우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다 챙겨주는 상냥한 여자여야만 한다. 뚱뚱한 여자는 “예쁘다”는 말 한 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뚱뚱한 여자는 남자가 남들한테 쪽팔린데도 견디고 있을테니,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귀어주는 것을 은혜로 생각해야 한다. 남자들은 여자들의 약점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특히 몸매에 자신이 없는 여자에게, 남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자신의 사랑을 무슨 커다란 수혜라도 되듯이 으쓱대는 것이다. 


제대로 밥을 못 먹어서인가. 아니면, 아람이와의 대화가 나를 기운 빠지게 했을까. 퇴근을 하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었다. 버스를 타서 빈 자리에 앉았다. 임산부석이지만, 나중에 임산부가 오면 자리를 비켜주면 될 터였다. 임산부가 안 되어봐서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임산부보다 더 힘들었기에 자리에 앉는 게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시 졸았나 보다. 눈을 떠 보니, 내 옆에 지친 표정의 할머니 한 분이 꽤 무거워보이는 시장 바구니를 들고 서 있다. 무의식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앉으시라고 권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슬쩍 내 배를 보며 말씀하신다. “됐어. 나이도 꽤 먹은 것 같은데 계속 앉아 있어. 나이들어 애 낳으면 더 조심해야 해.” 차마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대놓고 “저 임신 아닌데요”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버스 안에는 이미 나와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 앉아있는데, 할머니가 말씀을 이어가신다. 


“몇 째야?” 

“아…네…” 

“말을 잘 못하는 거 보니 셋짼가 보네. 요즘 셋째 낳는 거 흔치 않지? 그래서인지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던데, 그럴 필요 없어. 요즘 사람들 애를 안 낳아서 나라도 어렵다잖아. 애국하는 거야. 그리고 셋이 딱 좋아. 나도 셋 낳았어. 딸 둘, 아들 하나.”


잘 빨개지는 얼굴도 아닌데, 얼굴이 시뻘개졌다. 엉겁결에 애 셋 낳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루라도 이런 일이 없이 지나갈 수는 없는 걸까. 도저히 버스에 계속 타고 있을 수가 없어서, 다음 정거장에 후다닥 내렸다. 할머니께 “이제, 여기 앉으세요”라는 말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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