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gue by Albert Camus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고 거칠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단다. 인류는 늘 더 나은 곳으로 움직이고 발전한다는 직선적 역사관. 평균적인 삶의 모습이 윤택해질 지언정 인류는 해결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같은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다는 원형적 역사관.
천연두, 황열병, 흑사병 등과 같이 과거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굵직한 전염병들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종식되었거나 위험성이 낮아졌지만 (직선적 역사관), 계속 예상하지 못한 전염병의 습격에 허덕이며 고통받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원형적 역사관). 이제 말해서 뭐해, 코로나. 기존의 그 어느 변이보다 전염성 강한 오미크론이라니.
전세계가 코로나 종식을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현재까지로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항상 우리보다 앞서나가고 있다. 마치 '내가 원할 때 사라지기 전까지는 계속 도돌이표 뿐일꺼야'라는 듯이 말이다.
전세계 판데믹이라는 사상초유의 상황이 햇수로 3년이 되고있는 오늘날, 이보다 더 확실하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The Plague by Albert Camus)가 섬뜩하도록 생생하게 와닿는 환경이 어디 있을까 싶다. 코로나 이전이었으면 '어차피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뉴스 헤드라인에서 단 하루도 코로나에 관련한 언급이 떨어진 날이 없는 시대에 읽는 이 책은 마치 역사기록 혹은 예언서같다. 어떤 특별한 신기가 있어 알베르 카뮈가 오늘날의 일을 예언했을 리는 없고, 늘 강인하고 세상 적수 없는 것 처럼 거만하게 떵떵거리나 사실은 풍전등화같이 약하고 얇은 유리장같이 위태로운 인간, 인생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체에 책의 곳곳에 묵직하게 들어가있는 카뮈의 관찰력과 철학이 참 영리하다.
소설의 배경은 1940년경 알제리의 어느 해안 도시 오랑(Oran). 느닷없이 과거에 사라진 줄 알았던 흑사병(plague)이 쥐들에 의해 퍼지게 된다. 첫 사상자가 나오자 그의 담당의사 리외(Dr. Bernard Rieux)는 의사협회와 정부당국에 이 사태를 보고, 즉각 조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지만 그들의 첫 반응은 미적지근하다. 결국 흑사병이 급속도로 퍼지고 사상자숫자가 가파르게 오르고 나서야 도시 오랑은 폐쇄되고 페스트는 오랑 시민들에게 한껏 발톱을 내세워 상처를 낸다.
높은 사상률과 끔찍한 고통을 동반하는 페스트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받는 정신적, 심리적 피해는 컸다. 숭고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사회적 고립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미쳐갔다. 타인과 정상적인 대화를 하는 일 조차 힘겹기도 했다.
이게 바로 우리네 일 아닌가. 과거 흑사병과 비교했을때 훨씬 낮은 치사율, 그리고 과학의 발전으로 감염경로가 밝혀진 코로나라는 점에서 우리는 분명 큰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전염병이 자욱하게 남기는 자국들은 괴롭고 고통스럽다.
토론토는 2020년 말부터 2021년 중순까지 넘어올 때 까지, 300여일동안 락다운(Lockdown, 봉쇄)이라는 초강수를 뒀었는데 북미에서는 최장, 세계적으로도 손가락 안에 꼽는 길고 길었던 봉쇄였다. 락다운 단계가 조금씩 풀리면서 겨우 몇년 전 합법화된 마리화나 가게들이 최근 번화가의 구석구석마다 우후죽순으로 자리잡은 것을 보고 깜짝깜짝 놀란다. 코로나블루의 영향이 컸으리라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그동안 코로나로 인해 벌어진 안타까운 소식을 적지 않게 접했다.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이제 중학생인 아이들 둘이 코로나가 터지기 1년전에 이민을 왔는데 가족들이 단체로 코로나에 걸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부모님은 생사를 오가는 중증에 중환자실에 격리되어 있고 금방 상태가 호전된 아이들만이 의지할 곳 하나 없이 텅 빈 집에 남게 되어 사정을 알게 된 사람들이 오며가며 아이들의 식사를 만들어주었다는 이야기. 무증상으로 유치원에서 코로나에 걸려온 아이가 오랫만에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놀러갔는데 면역력이 약하신 조부모님께서 1주일만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코로나는 아니었지만 친한 친구의 부모님이 락다운중에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에 갈 수 없어서 한참뒤에야 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미안하고 서럽고 속상했는데 내가 가진 슬픔의 조각은 사실 매우 작은 것이겠지.
소설 페스트의 결말은, 페스트가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던 첫모습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하는 카뮈의 말이 걸작이다. 이 비극은 언제든지 우리를 또 찾아올 수 있다고. 사라진게 아니라 잠시 모습을 감췄을 뿐이라고.
페스트가 사라진 후 살아남은 오랑 시민들은 그들의 건재함을 축하한다. 막 어둠을 뚫고나온 이들의 축하에 스리슬쩍, 자연스레 역시 잠깐 수면위로 가라앉아잇었던 인간의 본성이 끼어든다. 그들은 또다시 인간의 강인함과 위대함을 찬양한다.
코로나가 물러가면 우리는 금방 예전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문밖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마스크를 끼고, 식료품 가게나 쇼핑몰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피해 멀리 돌아가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졌다. 지금은 실감이 잘 나지 않을 지언정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무서워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오면, '그땐 그랬지'하면서 지금의 날들을 웃으며 이야기하겠지.
그래서 난 이 책을 몇번은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때까지 감사하게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건, 내 주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건 우리가 코로나로 아파했던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특출나거나 강인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렇게 된 일일 뿐이라는 것을 자꾸만 내 마음속에 각인시켜야 할 것 같아서다. 내 의지로 피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지만 사실 그것을 뛰어넘는 비극들이 얼마나 우리네 인생에는 비일비재한가.
단단하고 대단한 것 처럼 보여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은 사실 얇은 유리처럼 불안한 것이라는 걸, 비극들은 불쑥 불쑥 나타나 우리에게 몇번이고 일러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연민이 묻은 마음과 시선으로 내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면 내 마음이 그리고 세상이 조금 더 따뜻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엄마가 말씀하셨다. 나이가 60이 넘어가니 주변 사람들이 종종 당신의 마음이나 기준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더라도 훨씬 너그럽고 인자한 마음으로 보게 되더라고. 우리는 모두 찬란한 태양빛에 쉽게 도취되다가도 예상치 못한 풍랑에 금방 바스러지고 아파하는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인생을 살고 있으니, 이렇다 저렇다라는 꼬리표를 서둘러 붙이려고 하기 보단 애틋한 마음이 먼저 들더라고.
풍랑을 여러번 맞닥뜨린 상록수는 뿌리가 깊다했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내가 허락된 삶의 영역에서 조금이라도 더 무던하게 묵직하게 인생을 지나려면 내 뿌리를 굵고 깊게 내리는 법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해야겠다.
거론된 책:
알베르 카뮈 - 페스트 (The Plague by Albert Cam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