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감에 대한 분노

-민폐끼치는 자의 소고1

by 최명진


오늘도 눈을 떠 맞는 새로운 아침~~!!

핸드폰 알람으로 눈을 뜨면서 습관처럼 오늘의 일정을 곱씹는다.

오늘은 오전엔 특수학교의 부모교육이 있고, 오후엔 사회적경제박람회 운영위가 있다.

그리고 저녁엔 연리지장애가족사회적협동조합의 면접이 있다.

이 커다란 세 가지로 충분히 분주한 하루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군가의 말처럼 새로 시작하는 하루가 설렘으로 시작되는지, 두려움으로 시작되는지는

자신이 하기 나름이겠지.

내 상황은 설렘과 두려움의 딱 중간쯤~~!!!



잡상이 많은 내가 주로 선택하는 방송매체는 라디오이다.

라디오를 들으면 다른 일을 할 수 있지만, 영상이 가미되면 행동이 통제를 당하기 때문에

라디오를 선호하는지 모르겠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상상을 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영상이 주는 강점은 있는 궁금증을 즉시 풀어주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상상의 기회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그렇게 설거지를 하다가 들었던 말 중에 비수처럼 꽂힌 말이 바로

'통제감에 대한 분노'였다.

그냥 귀로 들었을 뿐인데 그 분노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장애자녀를 키우는 내가 가장 많이 범했던 오류이기도 하고, 장애학생들에 대한

교육의 현실이 또한 그러하다는 마음에서였다.




교육을 앞두고 난 너무 많은 생각을 했나 보다. 어느 순간 다가온 출발시간을 인식하곤

황급히 부모님들을 만나러 갔다. 지난밤 교안을 돌아보며 채 채우지 못한 공간에 대해

고민만 하다가 결국 채우지 못한 채 출발을 했다.

그 빈 공간은 그냥 최대한 진정성 있게 말하자. 그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내가 활동을 하며 했던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장애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의 공감대를

최대한 만들어 스스로 느끼고 돌아보도록 하자.

짧은 두 시간의 강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러 오는 엄마들은 없을 것이다. 설혹 다급함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왔다한들 천천히 풀어갈 매듭임을 느끼게 하는 것 또한 나의

역할이니까.

어쩜 내 귀에 강하게 꽂혔던 '통제감에 대한 분노'를 공감만 해도 좋지 않을까.

운전을 하면서 이 말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달할까 고민하는 사이 학교에 도착했다.



부모들이 주최한 부모교육이었다. 나름의 절박함이 있었던 것 같다.

많은 부모님들은 아니었지만 인원 자체가 소통하기엔 좋은 인원이었다.

장애유형은 다를지라도 장애자녀를 키운다는 이유로 많은 배제와 불편함을 느꼈던

부모님들이기에 공감대 형성으로 시작을 했다. 물론 부모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장애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인정을 하고 장애자녀를 키운다는 커다란

공감대 하나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부모님들은 그렇게 내 이야기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부모로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많은 다양한 상황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땐 강한

반응보다는 진지한 얼굴로 그 공감을 온몸으로 쏟아내었다.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가 행복하다.'

내가 주로 쓰는 강의 제목이다.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 않다.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싶다.

장애자녀는 부모를 통해 호흡, 감정,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활용한다.

그것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언어톤이 주는 감정과 몸으로 보여주는 감정은

인지 수준을 떠나 누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장애자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힘들어하면 자녀들은 부모의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힘들어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부모는 자녀의 거울이다. 자녀의 모습은 또 다른 부모의 모습일 수도 있다.

자녀의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을 찾아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자녀와 부모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장애자녀를 열심히 양육하는 엄마들의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가 바로 통제가 아닐까.

'통제감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했다. 분명 장애가 있는 자녀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는 치료, 교육, 양육이 때론 자녀에게 약이 아닌 독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이야기했다.

아이를 위해 한다는 말이 "하지 마", "안 돼", "그만 하랬지", "위험하다니까"란 말로

자녀의 욕구를 파악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행동을 요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부모 입장에선 자녀를 위하는 말과 행동이지만 정작 그 대상이 된 자녀들은

부모의 그 사랑이 오히려 더 지독한 통제로 느껴져 거부하고 짜증을 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어느 누구도 지나친 통제를 즐겁고 유쾌하게 수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정말 사랑한다면, 정말 상대를 위한 일이라면 그들의 의지와 욕구를 파악해

소통해야 할 것이다.



부모님은 양육의 어려움도 있지만 암담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짐이다.

나만큼 내 자녀를 사랑해주고 보살펴 줄 누군가가 없다는 것에 대해 많이 절망한다.

그런 미래에 대한 불안은 부모님들에게 사랑이란 이름으로 '통제'를 강요하게 한다.

어떤 어머님도 장애자녀가 누군가의 로봇이 되어 살길 바라지 않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을 내 아이가 살아가기 위해선 자녀의 욕구와 자기결정이 아닌 거부, 배제되지

않기 위한 통제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당사자가 즐겁고 기쁘지 아니한데 과연 누구를 위한 교육이란 말인가. 중심인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장애를 이유로 사회가 원하는 조용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그러나 그 통제로 엄마도 자녀도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더 '통제감에 대한 분노'를

유발시켜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교육이 힘든 것은 비단 교육을 하는 그 행위 자체만은 아니다.

완벽하지 않은 내가 부모님들 앞에 서는 부끄러움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좀 더 언어와 행동에 신경을 쓰며 입으로 뱉는 독한 말을 자중하려고

노력한다. 누군가 한 행동이 진저리 치도록 싫다면 그 행동만큼은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이것은 교육을 하러 다니는 나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이미 장애인들은 충분히 장애를 이유로 통제당해 왔고, 그렇게 강요를 받고 있다.

통합교육을 한다는 미명 아래 너무도 많은 통제를 받고 있음을 현장에서 본다.

어쩜 그들의 분노는 이미 예견된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분노는 장애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통제에 의한 분노가 아닐까.

내게 맞지 않는 옷을 걸쳐주고 이것이 맞다고 강요하는 상황은 아닐까.

그들이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소통을 통해 충분한 사전예고와 동기부여를

해준다면 억지로 시간을 채우며 분노를 폭발하지 않은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분노도 습관이다'란 책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통제된 상황이 이어지면 분노를 표출하게 되고, 그 표출이 반복이 되다 보면

습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분노를 습관으로 만들지 않도록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일방적인 통제가 아닌 지속적 관심과 욕구 확인으로 상생하는 소통을 해야 한다.





부모님들과의 대화는 교육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졌다.

몰랐을 땐 그냥 지나칠 수 있었던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면서 궁금증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이 2007년에 제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법대로 되어지는 것이 별로 없는 현실을 자각한 부모님들의 분노는 어쩜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분들에게 냄비처럼 한 번에 끓어올라 넘치는 관심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지켜지고 수용되도록 요구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씀드렸다.

또한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기에 정보나 지원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찾아야 함도.

분주한 일정을 끝내고 파김치가 되어 퇴근해 온 내게 '띵동'문자가 도착했다.

'오늘 교육 아주 유익했다며 마음속에 하나씩 각자의 숙제를 담고 갔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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