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체육인을 위한 병역특례 제도는 충분히 공정한가
Edited by 주현우
"한낱 게임이라며 재미, 우정 따위를 운운하는데, 알다시피 우리를 비웃는 거에요. 소련 놈들은 체스를 이용해 자기네들의 지적 능력이 타락한 서방 국가들보다 우월하다고 선전하는 중이죠. 미국을 아주 엿먹이고 있어요. (중략) 우리는 전쟁 중입니다. 총과 포탄은 없지만 이미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어요. 브루클린 출신의 가난한 청년 대 거대한 소련 제국! 더할 나위 없는 미국적 스토리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체스 선수로 잘 알려진 '바비 피셔'의 전기를 다룬 영화 <세기의 매치>의 한 장면이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두 국가는 체제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선전 경쟁을 벌였다. 군사기술, 우주탐사, 경제지표 등 모든 분야에서 경쟁했다. 두뇌 게임으로 잘 알려진 체스도 그 전장 중 하나였다. 겉으로는 한낱 게임에 불과했지만, 체스판 아래에선 국가의 위상을 건 대결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련은 일찍이 국가 주도로 체스 선수를 육성했다. 그 결과 소련 선수들이 당시 체스계를 재패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자국 선수들의 고전에 번번히 자존심을 구겨야 했다.
이때 뉴욕주 브루클린에서 바비 피셔라는 선수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열네 살의 나이로 최연소 미국 챔피언 자리에 오른 그를 당국에서 놓칠 리 없었다. 정부는 바비에게 국가의 이념과 적국을 향한 분노를 지속적으로 주입한다. 세뇌를 당한 바비는 소련의 스파이가 자신을 해치려 한다는 등 극심한 편집증을 앓게 되고, 점차 삶을 잃어간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원제 'Pawn Sacrifice'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체스에서 폰(Pawn)을 희생해 전체적인 경기를 유리하게 풀어가는 전술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냉전 당시 양국의 체스 선수들이 체제 선전의 도구로 희생된 역사를 은유한다. 역사적으로 정치는 국가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문화를 활용, 더 나아가 착취해왔다.
국위선양이란 '나라의 권위나 위세를 널리 떨치게 한다'는 뜻으로, 주로 체육·예술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을 이뤘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문화강국을 이룰 정도의 국력이 있다는 사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다. 대표적으로 '두유노클럽'이 있다. 한국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두유노 ○○○?'라며 대신 들이밀 수 있는 이름, 이를테면 싸이, 봉준호, 손흥민 같은 월드스타들이 국위선양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에야 나라의 존재 유무도 모르는 경우가 드물지만, 과거에는 아무도 한국에 대해 모른다는 설움이 있었다. 국민들은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얻어 한국을 널리 알릴 수 있길 염원했다. 정부 역시 세계 무대에 정권을 선전하고, 집권의 토대를 공고히하기 위해 보상을 내결고, 국위선양을 적극 장려했다. 그 보상 중 하나가 병역특례(이하 병특)였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예술·체육인을 위한 병특제도(이하 예술·체육요원 제도)가 마련됐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받은 예술·체육인들이 병역을 자기계발, 봉사 등으로 대신할 수 있게 해주는 대체복무제도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당시 일반적인 병특제도(전문연구요원, 산업기능요원 등)는 급격한 경제발전 속 늘어난 산업인력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도입됐다. 인구가 폭증하며 남게 된 병역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반면 예술·체육요원 제도는 오로지 국위선양을 위해서라는 목적을 분명히 했다. 그만큼 국위선양은 중요한 문제였다. 제도의 1호 수혜자는 1976년 여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 선수였다. 당시 양정모 선수가 딴 금메달은 한국의 첫 올림픽 참가(1948년, 런던) 이후 나온 최초의 금메달이었다. 전국이 들썩인 대사건이었으며, 박 대통령도 당해 열린 전국체전 연설에서 '이와 같은 성과가 국력의 상징이라 믿는다'며 추켜세웠다. 축제 분위기 속 양정모 선수의 병특은 국위선양에 대한 마땅한 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예술·체육요원 제도는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한다. 개정이 이뤄질 때마다 수혜 대상과 범위가 달라졌다. 이때 기준이 되는 건 국민 정서였다. 정치권은 국민들의 요구와 반응에 따라 병특제도를 주물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축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병특 혜택을 준 게 대표적이다. 4강 신화 직후 범국민적 흥분이 정치권을 자극했고, 곧 '월드컵 16강 병특' 조항이 만들어졌다. 급조된 조항은 당연히 오래갈 수 없었다.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이 계속됐고 결국 5년 뒤, 비슷한 과정으로 제정된 '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 병특' 조항과 함께 삭제됐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기 흐름과 상관 없이 출전시키거나, 실력과 무관하게 기용하는 행태가 도마에 올랐고, 곧 시정됐다. 이러한 사례들은 병특의 기준이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변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랜 시간의 사회적인 합의를 통해 변모해온 병특제도. 현재 어떻게 시행되고 있을까. 관련 논문에 따르면 예술·체육요원 제도는 세 가지 지점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첫째, 당위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산업기능·전문연구 병특제도는 국가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다. 하지만 예술·체육요원 제도는 그렇지 않다. 외교 지형이 굳어지고, 정보기술이 첨예하게 발달한 오늘날 국위선양은 구시대의 산물이 돼버렸다. 둘째, 형평성이 없다는 점이다. 병특 헤택을 받는 대회가 따로 있고, 기준도 제각각이다. 왜 체육분야에만 많은 혜택을 주냐는 지적도 있다. 셋째, 의미가 변질됐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인식하기에, 병특제도는 병역기피 수단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국제대회마다 논란이 반복되며, 제도가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이다. 결국 국위선양이라는 명분을 잃은 병특제도는 국민들에게 박탈감만 안기는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한편에선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고,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크게 세 가지 대안이 제시된다. 첫째, 세금을 중과하는 방안이다. 국위선양의 시대가 끝나며 예술·체육요원 제도는 존립 근거를 잃었다. 따라서 다른 병특제도들처럼 기능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박탈감을 줄이기 위해 세금을 많이 때리자는 주장이다. 둘째, 누적점수제의 도입이다. 누적점수제는 대회, 등수마다 점수를 매겨 일정 점수 이상 획득한 선수에게 병특 혜택을 주는 제도다. 한번 금메달을 딴 선수보다 지속적으로 은메달을 딴 선수가 국위선양에 더 많이 기여하지 않았냐는 논리다. 셋째, 입영연기제 도입이다. 체육선수들는 전성기가 짧고, 보통 30대 중반이 넘어가며 은퇴한다. 따라서 그 이후로 입영을 연기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전히 갈 길은 멀지만, 공정한 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분명 예술·체육인을 위한 제도인데, 대체로 논란은 체육계에서 터져나왔다. 병특 혜택을 받는 예술인이 체육인보다 많은데도 예술요원 제도는 비교적 잠잠하게 운영돼왔다. 왜 그럴까. 앞서 국민 정서가 병특제도를 바꾼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예술분야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예술요원 제도가 안기는 박탈감도 적기 때문이다. 체육은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리는 이항대립적인 성질로 인해 국제대회일수록 큰 관심을 모은다. 반면 예술은 그렇지 않다. 승패보다는 완성도, 스타일 같은 연주자 개인의 역량이 더 부각된다. 대체로 체육분야가 더 직관적으로 즐기기 쉽다는 특성도 있다. 또한 체육 선수들은 대체로 많은 연봉을 받는다. 이미 ‘다 가진' 이들에게 병특 혜택까지 주는 건 더 큰 박탈감을 유발할 여지가 컸다. 예술분야는 (물론 예외는 있으나) 상대적으로 이런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현행 예술요원 제도는 119개 부문 42개 대회를 대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중 대부분은 음악 관련 국제대회(콩쿠르)이며, 국제대회가 없는 국악과 한국무용 경우 국내대회도 인정해주고 있다. 예술요원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체육요원 제도와 마찬가지로 형평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모두가 납득할 만한 뚜렷한 기준이 없다는 뜻이다. 예술 분야에는 고전음악과 무용뿐 아니라 영화, 문학, 대중음악 등 다양한 분야가 있고, 이들이 국위선양과 문화창달이라는 목적에 더 부합하는데도 혜택이 주어지지 않는다. 동일 종목 안에서도 문제는 비슷하다. 국제대회마다 위상은 천차만별 다르나 기준(국제대회 2위 이내·국내대회 1위)은 일괄적이다. 상대적으로 만만한 대회에 한국인들이 대거 몰리며 해당 대회에 '군면제 오디션'이라는 수식어도 붙었다고 한다. 예술계 종사자들은 예술요원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정작 그 범위는 지속적으로 줄어왔다. 2008년만 해도 편입이 인정된 대회는 지금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한편 방탄소년단 멤버들의 입대 예정일이 다가오며 축소일변도를 걸어오던 예술요원 제도가 중대한 변곡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국위선양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을 가져다준 방탄소년단도 병특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최근 한국갤럽이 진행한 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6명이 대중예술인에게도 병특 혜택을 줘야 한다고 답했다. 대중예술인 대체복무를 허용하는 병역법 개정안도 현재 국회를 계류하는 중이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각종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안면마비, 육손, 심장병을 가진 사람도 4급(보충역)으로 끌려가는 마당에 다 가진 방탄소년단은 병역을 면제해주려 한다'는 비판이 일었다. 누리꾼들은 방탄소년단에게 병특을 주는 건 '군대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나 가는 곳이며, 병역은 시간 낭비'라는 사실을 정부가 인정하는 꼴이라고도 지적했다.
방탄소년단 병특을 둘러싼 찬반의 대립을 한층 파헤쳐보면 '병특제도의 공정성을 어떻게 이뤄야 하는가'를 둘러싼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찬성하는 쪽은 방탄소년단이 '다른 병특 수혜자보다' 많은 이득(국위선양, 경제적가치 등)을 가져다준다고 주장한다. 이보다 덜한 분야에서도 시행되고 있는데 이들을 안 해주는 건 형평하지 않다는 뜻이다. 반면 반대하는 쪽은 해외 상업차트까지 병특에 포함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쌓은 기준뿐 아니라 병역제도의 근간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 우려한다. 대중예술인을 포함하면 나머지 분야에서도 병특을 요구할 텐데, 한도 끝도 없이 넓어지는 걸 막을 수 있겠냐는 비판이다. 두 진영 모두 제도의 공정성을 근거로 제시했으나, 찬성 측은 대상을 넓혀서, 반대 측은 좁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장 방탄소년단뿐 아니라, 향후 예술·체육요원 제도의 방향성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버튼을 쥐고 있는 건 정치권이다. 병특제도는 늘 국민 정서를 바탕으로 변화해왔으며, 정치권은 이번에도 국민들의 반응을 살피며 결정을 내릴 것이다. 과거 우리사회는 국위선양이라는 기준 아래 병특제도의 대상을 확대 또는 축소해왔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공정성이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부상했다. 이번 논란에서 찬반의 입장이 모두 '공정성 강화'로 환원됐듯이 말이다. 병특제도는 달라진 가중치를 반영하는 쪽으로 개편돼야 할 것이다. 다만 공정성을 이루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남은 건 이 부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예술·체육인에 대한 혜택을 늘려야 하는가, 줄여야 하는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정성의 시대, 병역특례제도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
[참고문헌]
- 한승백, 상징정치로서 운동선수 병역특례의 수용과 비판, 한국융합과학회지, 8권 1호, 68-82, 2019
- 한승백, 상상된 국가대표: 상상된 공동체 개념을 통해 본 운동선수의 병역특례와 정체성의 정치, 한국스포츠사회학회지, 32권 1호, 47-59, 2019
- 한승백, 전국체육대회 연설문을 통해 본 박정희 시대의 국가주의 스포츠, 한국융합과학회지, 7권 4호, 142-155, 2018
- 박명숙, 무용수를 위한 병역특례제도 개선방안, 스포츠엔터테인먼트와 법, 17권 2호, 195-237, 2014
- 이혜정, 스포츠선수 병역특례제도(체육요원제도)의 형평성 확보방안, 스포츠엔터테인번트와 법, 20권 1호, 71-9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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