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gital Flood
전날 밤, 그는 마지막 회의를 마쳤다. SEC와 연준, 그리고 몇몇 글로벌 은행 대표들이 모인 자리였다. 공식적인 안건은 “디지털 유동성 위험 대응 방안.” 그러나 실질적인 주제는 하나였다. 그린넬 이후의 세상.
회의는 길고 지루했다. 누군가는 법을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신뢰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도슨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느꼈다. 신뢰를 잃은 사람들일수록 신뢰에 대해 길게 말한다는 사실을. 결국 회의는 아무 결론 없이 끝났다. 세상은 언제나 그랬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결정을 미루며 회의를 연다.
그가 회의실을 나설 때, 한 젊은 관료가 그를 불러 세웠다.
“회장님, 정말 그린넬이 한 명의 개인이라고 믿으십니까?”
도슨은 짧게 웃었다.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그가 한 명이든, 수백 명이든, 시장은 이미 그를 믿고 있잖아요.”
“그 말은… 아직도 그는 존재한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도슨은 대답 대신 창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순간, 그는 더 강해집니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조용히 불을 켰다. 어제까지의 그래프들이 여전히 모니터에 떠 있었다. 금리, 유가, 환율, 비트코인, 그리고 그린넬의 계좌 잔액. 모든 그래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었지만, 중심은 같았다. 두려움.
이제 그린넬이 움직이지 않아도 시장은 스스로 요동쳤다. 도슨은 알고 있었다. 공포는 전염되고, 전염된 공포는 체계 그 자체로 남는다는 걸. 누군가 불을 붙였을 뿐인데, 세상은 이미 그 불의 형상을 닮아버렸다.
칼이 들어왔다. “오늘, 언론 인터뷰가 예정돼 있습니다. ‘그린넬 이후 금융의 미래’라는 주제입니다.”
“미래라…” 도슨은 낮게 웃었다.
“회장님, 정말 그린넬이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끝났다면 좋겠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모든 시장은 새로운 그린넬을 기다리고 있어. 그게 인간의 본능이야. 불안이라는 이름의 연료 없이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럼 우리는 뭘 해야 합니까?”
도슨은 답 대신 한 문장을 남겼다.
“속도를 늦춰야 해. 세상이 너무 빨라져서,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판단하고 있거든.”
그날 오후, 그는 언론 앞에 섰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켜지고,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회장님, 금융권은 그린넬 사태를 ‘디지털 블랙 스완’이라 부릅니다. 앞으로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도슨은 잠시 말을 고르고 답했다.
“반복될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이름이 다르겠죠. 그린넬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시대의 이름이었으니까요.”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그린넬이 남긴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슨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돈은 언제나 인간의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가 되었죠. 인간이 돈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도슨은 홀로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도시의 소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멀리 허드슨 강 위로 저녁 노을이 번지고, 수십 대의 드론 카메라가 광고를 투사하고 있었다. ‘신뢰, 혁신, 속도.’—이 시대가 숭배하는 세 단어였다.
그는 손에 쥔 스마트폰을 바라보았다. 실시간 뉴스 알림이 떴다.
“그린넬 관련 계좌, 완전한 비활성화 확인. 마지막 거래는 9주 전.”
잠시 동안 도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을 껐다.
“끝났군.”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이 있었다. 정말 끝난 걸까?
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번호는 없었다. 발신자명은 단 하나의 단어. Grinnell.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전화를 받았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미세한 파도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건 바다의 소리였고, 동시에 신호음 같았다.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통화는 끊겼다.
도슨은 한동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래, 너는 사라지지 않겠지. 세상이 널 필요로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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