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아 달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 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이걸 잊지 말고 또다시 각자 핸드폰을 차고 거리로 나가서 꾸역꾸역 밥을 벌자. 무슨 도리가 있겠는가 아무 도리 없다. <밥벌이의 지겨움 중에서>
인류는 구, 신석기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벼농사의 시작 즉 잉여곡물로 계급사회로 분화합니다. 여기서 계급이나 이념적인 역사의 진화를 언급하기보단 지겨움의 본능적인 기인(起因)을 생각해보려 합니다.
인간이나 동물은 그 바로 근원적인 것이 먹을 것,
즉 포유류는 어금니로 질겅질겅 으깨어 먹는 본능적인 것에서 출발하지요. 앉은자리에서 아사(餓死)할 순 없으니 배고프다는 것은 도리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이죠. 노동은 본래 신성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네 밥벌이 노동은 그 신성함은 사라지고, 노동을 위한 부딪힘과 갈등만 수반됩니다. 가령 모든 노동은 신석기 구석기시대처럼 소유의 관념이 없는 공동체 생활이거나 아님 혼자만 할 수 있는 노동, 전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개인에 국한하는 노동이 존재한다면 노동은 그 본연에 신성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훈 작가가 신문기자에서 전업 소설가로 변모하는 데는 무엇보다 그 노동에 대한 혐오감으로부터 잘 관철할 수 있는 감각의 소유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본인 스스로 언급하듯이 추측 건데 신문기자 시절 "불화"의 연속적인 면에 시달려왔음을 짐작합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은 한 저런 글이 나올 수가 없겠지요. 혼자만의 노동을 수행할 수 있는 직업 중에 작가도 포함되겠지요. 물론 글을 쓴다는 것이 혼자만의 일이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일상의 단체생활처럼 시간과 업무를 제약하는 면에서는 그나마 자유로운 편이겠지요.
신문기자보단 작가가 그의 지겨움을 어느 정도 덜어줄 밥벌이라 감히 추측합니다. 뼈를 깎는 창작의 고통은 그 본래의 신성함이고 그 신성함을 위하여 주변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 권리는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감수하고 자유를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법정스님의 글 중 중노릇 중에 가장 힘든 것이 사람 관계라 하였습니다. 속세를 버리고 산중 절집에서 수행하는 수도자 생활 중에서도 사람 관계가 어렵다고 하니 하물며 일반 속세에 사람과의 부대낌이 없는 밥벌이가 어디 있겠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의 팔고 중에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인 원증 회고(怨憎會苦)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의 본질에서도 사람에 대한 원망을 논하는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그 지겨움을 미뤄 짐작이 갑니다. 밥벌이 속에서는 그 원증회고에 시달립니다.
얘기도 늘 하는 사람과 더 할 얘기가 많은 법,
삭히고 버티고 가끔 독한 주(酒)로서 달래기도 하고 기가 막히고 서러우면 말문 트인 사람에게 하소연도 해봅니다. 밥벌이에는 대책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럼 대책은 없어도 그나마 밥벌이를 덜 지겹게 할 수 있는 상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어느 정도 살만큼 됐다는 것은 완장 차고 일하라고 그만큼 쪼아 된 결과이고 그 폐해를 막기 위해 근로기준법이 생겨나고 노동법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말이지요. 그만큼 쪼아 됐음 이제 풀어줄 때도 된 것이 아닌가? 유럽이나 북미처럼 부유한 나라는 아니지만 안식년은 아니라도 언제까지 세계 최장시간을 자랑하는 근로시간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 것인지?
고리타분하고 경직된 임금체계에서 연장노동에 따른 돈의 맛에 현혹되어 건강을 해쳐가면서 벌 때 벌어야 된다는 자기 구속에서 언제까지 매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 언제까지 이렇게 자발적 순종에 따른 돈의 노예로 매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
다른 한 편으로는 요즘 고령화 시대 복지 패러다임에 힘입어 정년연장의 법안 발의가
불안정한 고용형태 현 상황을 비추어 볼 때 노동계나 사회 각계 전반에서는 반기는 분위기입니다만 근데 과연 노동의 연장이 반길만 힐 것인가 의구심이 듭니다.
연금의 고갈로 수급권자를 다시 일하게 함으로써 납입의 연장을 유도하여 아마 5~60대의 급여의 상당 부분은 연금과 건강보험으로 납부될 것입니다. 밥벌이 지겨움은 결국 개인에서 국가의 빚을 갚는 대안으로 연장됩니다.
연금수급권도 수명연장에 따라 60대에서 70대 아니 80대까지도 올라갈 것입니다. 먹고살기 위한 밥벌이가 이제는 연금 세금 내기 위한 밥벌이로 변질되면 그렇게 끝없이 끝없이 쉬지 못하고 죽으라 일만 하고 "일 권하는 사회"로 접어듭니다.
젊어서 그만큼 일했음 됐지 늙어 죽을 때까지 일하는 소리로는 공허하게 들릴 뿐입니다.
평균 100세 시대에 밥벌이 없이 30년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소리가 대세로 더 크게 들리는 이유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밥벌이에 중독, 노동의 중독, 돈의 중독이 되어 살아온 역사가
너무나 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휘청이는 유럽을 보면 과도한 복지행정에 많은 분석이 나옵니다만 정년연장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유럽 시민들의 데모 행렬의 모습에서
놀기만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것만 보는 우리네 관점에서 그들을 이해 못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진정한 휴식과 쉼을, 진정한 놀이를 모르고 살아온 우리네 역사에서는 좀 쉬게 해 달라는 말보단 좀 더 일하게 일하게 해 달라는 말이 더 현실적이고 어울립니다. 좀 쉬게 해 달라는 말의 진정한 쉼의 의미를 우리 사회가 공감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겠지요.
작가 김훈은 논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쉼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나는 노동을 싫어한다. 불가피해서 한다. 노는 게 신성하다. 노동은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가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노동에 의해 구성돼 있다. 나도 평생 노동을 했다. 노동을 하면 인간이 깨진다는 거 놀아보면 안다. 나는 일할 때도 있었고 놀 때도 있었지만 놀 때 인간이 온전해지고 깊어지는 걸 느꼈다'
-2013.04.30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