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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의 힘

가다

by movere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으려고 버티다 폐인 되는 사람들은 인생을 너무 승부관적으로 보는 이분법적 습성이 뇌를 지배하고 있어 삶의 루바토적 미학이 아쉽기는 하다. 인생은 일회성 승리와 패배의 승부라기보다 살아가거나 살아지는 연속적 무승부의 세계다.


성공했다고 해서 승자의 삶도 아니고 실패했다고 해서 루저의 삶은 더더욱 아니다. 굳이 승부로 빗대자면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승률을 따지지 않는 무승부의 삶이 인생이다. 삶의 터전이 냉혹하다고 해서 무조건 승리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미리 기권할 필요도 없다.


스포츠의 승부도 홈앤 어웨이가 있듯이 삶의 터전 또한 한 곳에 고정된 것이 아니며 척박하면 다른 터전으로 옮기기도 해 보고 다시 복귀도 하고 이적도 하고 그러면서 삶을 단련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지 적성도 실력도 모자라는데 버티기만 한다고 해서 능사만은 아니다.


미련이 남아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냉정하게 앞만 보고 떠나야 할 때도 있고 그냥 다시 머무를 때도 있다. 어느 것이 옳고 그르다의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선택의 개념이다. 이동한다고 해서 찬란한 길이 보장된 것도 아니듯이 머무른다고 해서 고진감래의 보상이 보장된 것도 아니다.


인생에서 터전의 이동은 선악이 아니라 선택이자 필수이다. 이동은 도전이고 머무름은 관록이다. 즉 다시 말해 이동의 힘은 노련함이 묻어나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이다. 이동은 죄악도 차선도 아닌 삶의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그 갈망이 목까지 차고 오르면 가야 한다.


머무르고 버티다간 폐인 된다. 준비가 덜된 습관적 이동은 무모할진 몰라도 긴 세월이 한 곳에 축적된 후의 이동은 뒷심을 발휘할 수도 있다. 항상 헛것에 갇혀있지 말고 깨어있기 위해서라도 이동은 새로운 활력이다. 진정한 이동의 갈망된 힘은 삶의 기원인 행복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관점 또한 다 다르다.


고정된 판에 이동의 변수가 발생하니 번거롭게 판을 새롭게 짜야하니 선악의 개념으로 삶을 고정시킨다면 참으로 아둔하다. 삶은 살아있는 선택이고 항상 이동하는 생물이다. 인생의 본능은 고정성이 아닌 이동성이 그 바탕인데 바탕을 모르고 미리 판만 짜니까 그저 버티라는 궤변이 탄생할 수밖에.


그게 비극이다. 왜 비극이 서서히 다가오냐 하면 완성될 수 없는 희극의 시나리오를 짠 무리들도 그 답을 모르는 것 같다. 이동은 승부도 선악도 아닌 자유와 행복의 이치인데 그것에 어긋난 희극은 비극이 되고 승리를 점친 승부는 패배가 된다. 그게 이분적 승패와 희비극의 관점이라면 말이다.


그 갈망에 따라 이기지도 지지도 않는 승부가 아닌 곳으로 이동하련다. 그 힘은 억지스러움도 아니고 자연스러움이다. 그 힘을 다른 억지스러운 힘으로 누르고 있으니 현실이 비극이다. 돈과 사람은 돈이 되는 곳으로 이동하고 자아는 더 자신다운 쪽으로 이동한다. 그게 이동의 힘인 것이다.


이동은 장소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더 자신다운 자아를 의미하기에 그 누구든 더 자신다운곳으로 이동하기 마련이다. 힘이 부쳐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이동해 간다. 가자! 승패가 없는 나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희비극이 없는 원래의 모습으로! 그게 답이다.


-2025년, 7월 낮에 시작한 글이 밤까지 이동하며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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