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CHUAP IN THE RAINY SEASON
지난 2023년 겨울, 선풍기 돌아가는 3등석에 실려 갔었던 태국 쁘라쭈압을, 이 번에는 에어컨 2등석을 타고 갔다. 한낮 무더위와 들러붙는 습기에 숨막히는 우기 여름 날, 다섯 시간 이상을 선풍기 3등석에 앉아 있는다는 건 고행을 자처하는 일일 터라 에어컨 석을 예매하였던 건데, 2등석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버리고, 에어컨에 감사하는 마음만 탑재하고서 승차하면 무난한 기차 여행을 할 수 있다.
SPECIAL EXPRESS TRAIN 2등석. 그리 넓지 않은 좌석을 더 좁게 만드는 효과를 내는 대체로 부서진 발걸이와 날씬한 사람 전용 낡은 좌석, 좁은 좌석 간격은 찍히지 않아서 양호하고 좋아 보여. 다행이야.
쁘라쭈압 가는 길. 이제는 낯익은 풍경이다. 산악 지형인 북부와는 꽤 다른 풍경을 2023년 처음 보았을 때의 신선함을 잊을 수 없다.
"엄마, 이런 풍경 볼 때마다 나는 '주라기 공원'이 생각 나. 공룡만 있으면 정말 완벽할 것 같은 풍경이야."
"공룡이 있으면 호러 아니냐?"
'주라기 공원'이 어떻게 시작되더라, 그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풍경이 시야에 쏟아지듯 들어왔다.
"엄마, 다 왔어. 지금 내릴 준비해야 돼. 카오청 끄라쪽이잖아. 모르겠어?'
"읭? 벌써 다 왔다고? 카오청 끄라쪽이 철로 쪽에 이토록이나 가까이 있었던가?"
2년 만에 다시 만나는 쁘라쭈압 기차역. 낯선 듯 낯설지 않은 느낌이 낯설었다.
이 번 숙소는 2년 전 묵었던 해변 쪽 아닌 쁘라쭈압 안쪽 깊숙이 자리한 곳이었다. 그런데, 편의 시설이 몰려 있는 해변에서, 혹은 기차역에서 멀어도 너무 멀었다. 우기 바닷가가 싫어서 이곳을 고집하였던 연짱이 얼굴색이 기차역에서 멀어질수록 시시각각 바뀌었다.
"연짱아, 해변까지 도보로 가능하겠니?"
"자전거 타고 다니면 돼."
자전거가 그렇게 쉽게 있을까? 매우 불안하였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 최선을 다하여 긍정 회로를 돌려보기로 하였다.
숙소 체크인을 마치고, 환전도 하고 점심도 먹어야 해서, 숙소에서 가까운--줄 알았던-- 큰 마트 로터스에 가보기로 하고 로비에 나왔더니.
더운 나라 우기에 흔한 스콜. 비를 참 좋아하는 나여도, 배고프고 척척하고 처량한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그래도 한 시간 반 쯤 지나 그쳤다.
로터스는 생각보다 숙소에서 지척에 있지 않았다. 문제는 큰 트럭들 다니는 위험한 4차선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 길 내내 인도가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 큰 도로로 가면, 멀쩡한 길에서도 뜬금없이 넘어지는 엄마는 분명 차에 치여. 구글 지도 보니까 골목으로 가면 금방이야. 골목으로 가자."
와, 어느 집에서 쏜살 같이 튀어나온 산 만한 개쉑 두 마리에게 물려 죽을 뻔 하였다. 그 중 누런 개쉑은 그냥 짖는 것이 아니라 이를 드러내며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유년 시절을 나름 시골에서 보낸 나는 안다. 그런 개는 진짜 문다. 소름이 쫙, 끼쳤다. 하지만 목숨 걸고 도착한 로터스에는 은행도, 푸드 코트도, 약국도 없었다.
이 번 여행 첫 데어리 퀸 인증샷. 연짱이가 사랑하는 데어리 퀸. 지금 보니 손에 감정이 실려 있다. 살아서 돌아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은 나의 손과, 데어리 퀸이다, 신나서 함박 웃는 연짱이 손.
"엄마, 일단 아이스크림 먹고 당 충전한 다음에 기왕 나왔으니까 해변까지 걸어가보자."
"걸어가는 건 좋은데, 그 개쉑들은 어쩌냐."
"괜찮아. 거기 골목이 세 갈래였어. 우리는 그 중 가운데 2번 골목으로 왔으니까, 갈 때는 1번 골목 아니면 3번 골목으로 가면 돼."
" . . . 되겠니, 그게?"
"돼. 그리고 안 되면 이 상황에서 어쩌겠어."
엉엉.
연짱이는 3번 골목을 택하였고, 좀 전에 만났던 두 마리 중 한 마리로 보이는 녀석과 딱, 조우하였다. 그럴 줄 알았다. 시골집들은 대부분 앞문과 뒷문이 있기 때문에, 3번 골목이냐, 1번 골목이냐는 사실 상 의미가 없다. 공포 때문에 발이 땅바닥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 개들은 상대방이 자기를 무서워하는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알아. 쳐다보지 말고 그냥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면 돼. 내 팔 꽉, 잡아."
키 크고 덩치도 큰 연짱이는 내 손을 꽉, 잡고 무슨 위기탈출 넘버원에 나오는 영웅처럼 재빠르게 골목을 벗어났다. 낮이었고, 한 마리 뿐이었고, 그나마 물려던 개쉑이 아닌 짖기만 하던 녀석이어서 무사히 빠져나왔던 것이지, 어두워지고 난 후 너 덧 마리 씩 무리지어 다니는 개들이었다면, 단언컨대, 물렸다. 더운 나라에서는 제 영역을 지키는 밤의 개들이 제일 무섭다.
쁘라쭈압 안쪽에서 해변 거리까지는 멀고 멀었다. 그냥 걷는 것도 힘든데, 굳이 길 맞은 편에서 우리를 향해 월월, 으르렁거리는 개쉑들까지 신경쓰면서 걸으니, 길이 천리 만리였다.
"진짜 커서 뭐 될래, 이 개쉑드을!"
"아니, 엄마.ㅋㅋ 쟤들 다 컸어. 다들 뭐든 됐다고, 이미."
어우, 진짜.
목숨 걸고 도착한 쁘라쭈압 해변. 오후여서 물이 빠졌다.
그런데. 우기의 쁘라쭈압은 내가 아는 건기의 쁘라쭈압과 매우 달랐다. 보행로와 도로 한 켠에는 바다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시커멓게 썩은 뻘이 가득하였고, 구석구석 썩은 흙냄새가 진동하였다. 샌들을 신은 내 발 사이사이에도 더러운 뻘이 들러붙고 끼고 하였다. 해변 보행로를 절반 쯤 걷는데, 정말이지 오만정이 다 떨어졌다. 이런 곳에서 무슨 해산물 저녁을 먹을 것이며, 저런 바다에서 건져올린 해산물을 먹는 게 과연 온당하려나. 미리 알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동네 안쪽에 묵기로 한 연짱이의 선택이 옳았구나, 싶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싸란위티 피어 쪽 골목으로 빠져나가 쁘라쭈압 시장으로 향하였다. 시장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굶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밥보다 과일을 더 많이 사 가지고, 더 어두워지기 전, 숙소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지, 저녁거리에 과일까지 양손 가득 바리바리 샀더니 무거워서 안그래도 아픈 손가락 떨어질 것 같이 아프지, 사나운 개쉑들 길 건너편에서 으르렁거리지, 정말이지 쁘라쭈압의 '쁘' 자도 듣기 싫었다. 아주 쫄딱 젖어서 숙소로 돌아왔더니, 리셉션에 앉아 있던 언니가 놀라서 나왔다. 괜찮아요?, 묻는 착한 언니.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안 괜찮아요, 라고 백 번 말하고 싶었다.
사람은, 아니, 나는 참 변덕스러운 동물이다. 비 맞으며 척척하게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내일 당장 쁘라쭈압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깨끗하게 씻고 뽀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앉아서 사 온 먹을거리를 먹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맛있는 과일을 아삭아삭, 먹고 있으니 마음에 긍정과 평화가 내려앉았다. 토니를 만나야 하는 쁘라쭈압에 온 거야, 이성이 깨어난 머리에 온당한 생각이 찾아들었다. 내일, 토니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