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치어멈과 네비게이터 딸내미, 폴란드 촘촘설렁기행문 8(N)
새벽의 우치 파브리츠나 중앙역은 광활한 데 비해 사람은 드문하여 휑뎅그레 무서웠지만, 경찰관들이 여기 저기 돌아다녀 실제로는 안전하고 깨끗한 곳이었다. 크라쿠프 행 기차는 20분 쯤 일찍 플랫폼에 들어와 대기 중이었다.
기차번호와 플랫폼, 호차번호를 몇 번이나 확인을 하고 탑승하였고 잠시 후 기차는 연착없이 출발하였다. 긴장이 풀리니 피곤이 몰려와 까무룩 졸다 너무 시끄러워서 깨어 내다 본 창 밖 크라쿠프 가는 길은 내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정신 사나운 기차 안에서 평정심을 찾으려 애쓰며 바라본 창 밖 풍경. 아무리 온화한들 영하를 넘나드는 한겨울인데 연두빛 혹은 초록빛 풀들이 가득한 들판이 참 볼 때 마다 경이로웠다.
창 밖을 내다보다 문득, 먼 곳을 떠도는 마음이 매우 아련하여 슬쩍 서글펐지만, 무작정 센티멘털해지기에는 지나치는 동네가 그림처럼 어여뻤다. 모니터에 따르면 크라쿠프 가까운 '미에호브(MIECHOW)' 즈음이라고.
지금껏 지나쳤던 기차 옆 동네들 중 가장 예쁘고 아기자기하여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지만, 졸린 연짱이가 너무 짜증을 내는 바람에 사진기를 건네받을 수 없었다. 정해진 여정이나 예약이 없었다면 중간에 내려 2박 정도 하며 천천히 둘러보고 싶었을 만큼 폴란드를 덴마크 네덜란드 같은 낙농국가로 보이게 만든 마법 같은 동네였는데. 내 눈이 본 모든 풍경을 내 눈이 본 그대로 사진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날 일기에는 내 머리 속에 든 풍경이 마치 영사기 파노라마처럼 흰 스크린에 투사될 수 있으면 참 바랄 것이 없겠다, 고 쓰여있었다. 그래서 도나, 베니아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내 삶이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축복, 내 삶을 관통하는 '선물' 그리고 '은혜'와 여행 내내 함께 하고 싶었다.
크라쿠프 중앙역에 도착하여 힘들게 짐을 빼고 어디로 가야 할 지 알 수 없어서 잠깐 머무작거리다가 눈 앞에 보이는 INFO 에 들어가 언니에게 숙소 위치를 물었더니, 언니가 간략한 지도를 꺼내 매우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연짱이는 그런 간략한 지도를 가지고도 해당주소지를 아주 정확히 찾아내었다. 이 아이가 내 딸인가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네비게이터 연짱이의 탁월한 위치 감각.
무거운 짐 문제는 해결되었고, 오늘 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 연짱이와 머리 맞대고 잠깐 고민을 하다가 무엇을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어서 구시가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크라쿠프 구시가의 시작을 알리는 바르비칸(BARBIKAN)은 멋있었고 마리아 대성당을 비롯한 성당들이 있는 구시가는 뭐라 말 할 수 없이 근사하였다. 피곤할 망정 시간은 많은 여행자인지라 발길 닿는대로 걷다보니 바벨성까지 가게 되었는데, 잔비 내리는 바벨성은 운치있고 아름답고 웅장하고 구슬펐다. 비 내리고 바람 불어 꽤 추웠지만 하염없이 걷고 싶은 공간이었다.
커피숍 혹은 기념품점 같은 곳이었을텐데, 작은 요정이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은 문이어서 연짱이에게 가보라고 시켰다.
"엄마, 여기?"
"엉, 거기."
"안에 뭐가 보이는지 알고 싶은거야 엄마?"
"(사실 하나도 안 궁금하지만) 어!"
"어두워서 안이 전혀 안 보여."
그럴 줄 알았다.
그림 같은 바벨성 그리고 그림 같은 바벨성 속 연짱이. 21세기의 아이가 14세기의 풍경 앞에 서 있다. 칠 백 년의 간극에 숨이 찼다.
바벨성은 말그대로 어마어마한 성이어서 여러 섹션으로 나뉘어 있고 결코 하루에 다 돌아볼 수 없는 규모다. 모든 섹션을 다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연짱이와 상의하여 '접견실(STATE ROOMS)' 만 보기로 하였다. '왕궁 사저(PRIVATE ROYAL PALACE)' 도 시간이 되면 돌아보았을텐데 다음을 기약하는 수 밖에 없었다. 크라쿠프는 넓고 볼거리가 너무 많아 해 짧은 겨울여행에서는 5박도 짧았다.
크라쿠프 4일 째 되는 날 워킹 투어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세 가지 건축양식을 모두 볼 수 있는 건물들이다. 나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고딕스타일이고 도로시는 언제나 르네상스 스타일을 선호한다. 나와 도로시의 공통점이라면 둘 다 로코코스타일은 넘쳐서 싫어한다는 점.
크라쿠프 중앙역.
폴란드 여행을 하기 전 중앙역을 '즈워프니(GŁOWNY)' 라고 발음한다고 열심히 공부해 갔는데, 막상 기차나 버스, 트램에서 나오는 안내멘트는 '그우브니' 정도의 발음으로 들렸다. 내 귀가 틀렸을 수도 있다. 크라쿠프 중앙역과 갤러리아 쇼핑몰은 매우 규모가 커서 어느 각도에서 보든 다 'KRAKOW GŁOWNY' 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약속을 잡거나 랜드마크 삼아 움직일 때는 많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소금광산 갈 때 깨달았다.
지하를 통해 중앙역으로 이어지는 갤러리아 쇼핑몰.
이 번 여행 통틀어 도시나 사람들 자체는 우치가 가장 마음에 들었고 체류 내내 행복하였던 곳은 크라쿠프였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포즈난과 비드고시치 체류를 아예 없애고 그 시간을 크라쿠프에 돌려 조금 긴 호흡으로 집중하고 싶을 만큼 좋았던 곳이다. 관광객 많고 북적이며 불친절하고 물가 비싸고 산만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여행동선에 잘 넣지 않을 정도로 큰 관광도시 질색하는 염개미가 참 예외적으로 좋아하였던 큰 도시. 그리운 크라쿠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