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중앙역, 빛바랜 연회색 눈동자의 누군가

길치어멈과 네비게이터 딸내미, 폴란드 촘촘설렁기행문 1(N)

도착한 바르샤바 중앙역은 내 예상보다 깨끗하고 쾌적하였으며, 집시나 취객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시큐리티나 경찰들이 많이 보여 좋았다. 중앙역은 꽤 복잡하여 길 잃기 십상이라는 말들을 많이 읽었는데, 아무래도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여 들어온 것이 아니어선지 복잡하다는 느낌은 감사하게도 없었다.


바르샤바 중앙역 플랫폼으로 가려면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 플랫폼을 이 나라에서는 페론(PERON) 이라고 부른다. 나중에 보니 복수형이 되면 페로니(PERONY) 가 되더라. 그리고 우리에게 1층인 곳이 이 나라에서는 0층이다. 그래서 숙소의 입구나 리셉션이 있는 곳은 대부분 0층이다.


여행자로서의 나는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참 없구나, 싶은 많은 증거들 중 하나가 노심초사병이 지나쳐 내 걱정이 투영되는대로 글자나 숫자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6시 기차인 줄 알고 동당거렸는데 전광 알림판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7시 기차였다는 것을. 연짱이는 이제 그런 에미에게 익숙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이 남았으니 아침이나 먹자고. 쿨한 연짱이.


어제 숙소 식당에서 저녁을 먹어서 현재 수중에 남은 돈은 50 즈워티 뿐이고, 나는 화장실을 가야 해서 화장실이 딸린 식당을 이용하여야 하고, 그런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 중 이른 아침 영업을 하는 식당은 맥도날드 뿐이어서 선택의 여지 따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맥도날드가 꽤 넓고 쾌적하였다는 점이었다.

현금 뿐인 나는 힘들게 키오스크 주문을 마쳤는데, 현금으로 주문을 하려면 키오스크 주문 후 매장 직원에게 영수증을 보여주고 직접 현금 계산한 뒤 번호를 부르면 받아가면 된다. 그러고 나서 깨끗한 화장실을 이용하였고, 연짱이가 잘 받아놓은 맥모닝 세트를 탈없이 잘 먹었다면 동유럽 중앙역이 아니겠지. 키오스크 주문이 어려워서 할 수 없이 택한 맥모닝이 따뜻한 차와 함께인 세트여서 아침부터 탄산 먹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며 연짱이와 웃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대화 중인 우리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딘가 술집이나 노상에서 값싼 술을 마시며 밤새 달렸는지 훅, 끼쳐오는 술냄새가 역한 사람이었는데, 배가 고프니 고기를 좀 사달라고. 나는 즈워티가 없어요, 하니 유로나 카드는 있을 것이 아니냐며 돈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먹을거리를 사달라는 것이라고. 남자의 빛바랜 연회색 눈동자가 너무나 뻔뻔하였지만, 이제와서 모른 척 하기에 나는 이미 영어를 알아들은 외국인인 것을 어쩌랴. 남은 20즈워티를 이 남자를 위해 쓸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끈덕지게 가지 않을 것이고, 잠깐 고민을 하다가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맥모닝을 그에게 넘겨주었다. 뻔뻔한 남자는 맥모닝에 만족하며 제 무리로 돌아가 내 대신 맛있는 맥모닝을 단 두 세 입에 먹어치웠고, 연짱이는 겨우 풀 몇 포기로 아침을 대신 해야 하는 에미가 안타까워 저 먹던 맥모닝을 내밀었다. 6시 기차였다면 풀은 커녕 동동거리며 뛰었을 터라 풀 몇 포기와 주어진 여유도 감사한 상황이기도 하였고, 솔직히 이런 상황 자체가 아직은 좀 재밌게 느껴지기도 하여 나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연짱이는 에미에게서 뺏은 아침거리를 거리낌없이 먹는 뻔뻔한 주정뱅이가 꽤나 얄미웠던지 "지방이 복부로만 몰려서 배볼록이나 돼라" 하고 저주 아닌 저주를. 가난한 한국인 아줌니에게 무언가를 얻어먹은 저 이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이겠지. 겨우 한 두 끼 안 먹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 아직 내게 남아있는 여유가 감사할 뿐이었다.


우치 행 기차를 탑승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