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프로덕트 디자이너 취업이 목표라면)
카네기멜론은 명실상부 세계 1위의 HCI 프로그램을 보유한 대학이다. 또한 세계에 몇 안 되는 HCI 학부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는 대학이기도 하다. 지금은 HCI를 주전공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내가 학부생일 때만 해도 HCI는 복수전공만 가능했다. 따라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진로를 이미 굳힌 난 HCI 복수전공에 합격했을 때만 해도 기대가 굉장히 컸다. 과연 세계 1위 프로그램에서 배우는 것들은 날 얼마나 강한 디자이너로 성장시켜줄지 너무 궁금했다.
하지만 모두 필수과목들과 선택과목들을 들어본 뒤 난 수업들 자체에는 상당히 실망을 많이 했다. 이 수업들은 우리가 흔히 접하는 실리콘밸리의 핫한 스타트업들의 멋있는 제품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무래도 명색이 프로덕트 "디자이너"인데 디자인 관련 요소가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HCI 수업에만 의존해선 절대 능력 있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될 수 없었다.
카네기멜론의 HCII 역사는 연구기반으로 시작되었다. 1980년도에 처음으로 사용자 테스팅 랩을 오픈했고, 1993년도에 처음으로 HCI기반 수업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므로, HCI 분야의 선구자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작 때문에 현재도 카네기멜론의 HCI 수업들은 리서치 중점으로 강하게 치우쳐 저 있다. 이런 접근방식 때문에 HCII의 박사 프로그램은 상당히 강한 편이다. 새로운 인터렉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AI, AR/VR 같은 최신 기술들을 접목하여 혁신적인 기능들을 많이 만들어낸다. 하지만 연구 외의, 실리콘밸리 업계의 프로덕트 디자인을 조금이라도 배운 분들은 알겠지만, 프로덕트 디자이너에겐 리서치는 일부분일 뿐이며, 심지어 많은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UX 리서쳐를 따로 채용하기 때문에 스타트업에 입사하지 않는 이상 실제로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리서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할 필요가 없다. 연구자와 현업 실무자는 엄연히 포커스가 다르다.
물론 업계에서도 리서치는 굉장히 중요하다. 모든 성공적인 제품들은 사용자들의 니즈에 의해 개발되었고, 따라서 사용자를 이해하는 분야인 UX 리서치는 제품의 성공에 굉장한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프로덕트 디자이너는 리서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리서치 결과를 가지고 임팩트를 불러오는 기능들을 구상하는 프로덕트 싱킹 (Product thinking),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로 디자인할 수 있는 시각 및 인터렉션 디자인의 비중도 굉장히 크다.
내가 느낀 카네기멜론의 HCI 수업들은 60-70% 이상을 리서치에 중점을 맞추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이 사용자들을 인터뷰하고, 데이터를 수집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방법에 소요되었다. 막상 리서치의 통찰을 가지고 실제 제품을 디자인해야 할 땐, 실리콘밸리 실무경험이 거의 전무한 교수님들은 딱히 현재의 트렌드에 맞춰 제품의 방향을 설정해 주고 시각 및 인터렉션 디자인을 잡아주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그 결과 많은 학생들은 실제 디자인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많이 헤맸고, HCI를 복수 전공하는 시각디자인과 학생들은 비 디자인과 출신 HCI 학생들의 저조한 디자인 능력 때문에 항상 눈치를 주었다. 시각디자인과 학생들 입장에서는 타이포그래피, 레이아웃, 화이트스페이스의 기본도 모르는 디자인 비전공 학생들이 디지털 서비스를 디자인한다고 이상한 폰트로 무작정 버튼을 만들어 내는데 아마 신물이 났을 것이다.
나는 다행히 고등학생 때부터 시각디자인에 큰 관심이 있어 어릴 때부터 각종 포스터, 잡지, 웹사이트 디자인을 접해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고도 쉽게 디자인 퀄리티에 기여를 할 수 있었지만, HCI 복수전공 프로그램의 대다수 학생들은 비 디자인 전공 출신 (데이터 사이언스, 엔지니어링, 정보시스템, 컴퓨터공학, 경영/경제학 등등)이었기 때문에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요구하는 완성도 높은 프로젝트를 만들어 내는걸 많이 힘들어했다.
나 역시도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최종 결과물의 퀄리티를 높이느라 많은 애를 먹었다. 누구나 그렇듯, 사람들은 누구나 아이디어는 있지만 그걸 성공적으로 도출해 내는 사람들이 훨씬 드물다. 팀원들 모두 리서치 방식들은 반복해서 배웠기 때문에 문제가 없지만, 리서치 인사이트가 나온 뒤 실제 제품을 구상하는 단계가 오면 프로덕트 싱킹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상태에서 굉장히 식상한 기능들이 아이디어로 많이 나오고, 채택되기도 한다.
실제 디자인이 진행되면 시각 디자인의 기본적인 소양인 색,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레이아웃이 하나도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디자인하기 때문에 최종 결과물이 엉망이 되기 마련이다. 내가 HCI 프로그램이 가장 답답했던 부분도 이 부분이다. 교수진들은 디자인과 출신이 아닌 컴퓨터공학 출신의 HCI 교수들이 많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전혀 잡아주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오로지 학생들의 힘으로 디자인을 독학하여 완성품을 만들어 내아 한다.
내 개인적인 디자인 철학은 통찰 깊은 리서치를 뿌리로 하되, 사업적, 그리고 시각적 완성도도 높은 제품이 성공적인 프로덕트 디자인의 지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카네기멜론 HCI 교수님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싶었다. HCI 수업에서만 진행하는 데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실리콘밸리 취업은 많이 어려울 것이다. 따로 시간을 내어 시각디자인에 대한 견문과 이해를 넓혀야 비로소 완성형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에서는 design crit이라는 제도가 아주 잘 자리 잡아있는데, 다른 디자이너들과 자주 디자인을 공유하며 피드백을 받는 프로세스이다. 하지만 디자인과 출신 교수님도 적고, 학생들도 디자인을 접해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퀄리티 높은 피드백이 나올 수 있을까?
한 번은 HCI 디자인 스튜디오 수업 때 디자인 크릿이 진행되고 있는데 iPhone X의 흔히 말하는 "M자 탈모"쪽 노치가 존재하는 디바이스를 위한 프로젝트였다. 어떤 팀이 최종발표를 하는데 노치 쪽 마진은 전혀 신경 안 쓴 채 상단바의 텍스트가 너무 노치에 딱 붙어있길래 내가 iOS용 어플을 디자인할 때는 되도록 애플에서 게시하는 Human Interface Guidelines를 따라 노치에 마진을 더 줘야 한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 뒤는 상상에 맡기겠다. 수업에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나를 노려보며 "쟤는 왜 저런 피드백을 준데?" 하는 눈치였다. 이런류의 시각 디자인적 완성도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것이다. 나는 분명 디자인 스튜디오 수업이라 중요한 피드백을 주었던 것인데, 그 상황이 참 안타까웠다. 비슷하게 내가 속했던 팀프로젝트 때도 UI가 너무 엉망이어서 손을 봐야겠다고 말했더니, 아무도 손대지 않아 결국 내가 혼자 밤을 새우며 UI와 인터렉션을 수정해야 했던 적도 많다. Ease out 커브로 애니메이션을 넣어야 자연스러운데 모든 게 Linear 커브로 되어있지 않나. 버튼들의 사이즈가 다 소수점으로 되어있질 않나. 그리드는 깡그리 무시되어 있었다.
Parsons, SVA와 같은 전형적인 미대에서 프로덕트 디자인을 배우면 학생들은 이미 다른 필수과목들에서 시각 디자인에 대한 기초를 잡은 뒤 프로덕트 디자인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그들은 UX 리서치 방식과 프로덕트 싱킹만 배운다면 상당히 퀄리티 높은 프로젝트를 만들어내기 더 유리하다.
내가 느낀 바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목표라면 HCI 프로그램 입학이 유일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미대에서도 충분히 완성도 높은 프로덕트 디자이너 졸업생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결국엔 본인의 부족한 점을 어느 프로그램에서 가장 잘 메꿀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