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4편
뇌는 늘 변한다
이 책의 부제는 "최신 신경과학이 밝히는 괴롭힘의 상처를 치유하는 법"이다. 이 문구를 읽고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예전에 괴롭힘을 당했던 상처를 치유하고 싶었다. 아직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것 같았다.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마음에 난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내면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았고 어떻게 치료해야하는지도 몰랐다. 내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였다.
괴롭힘을 당한 기억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다지 부끄럽지 않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에 나처럼 괴롭힘을 당한 사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타인에 의해 다쳐본 경험이 있다. 다양한 사람(부모, 형제자매, 친구, 배우자, 어른, 아이, …)에게 다양한 폭력(괴롭힘, 모욕, 학대, 방치, 무시, 차별, 배척, …)을 당한다. 폭력은 모두를 무력하게 한다. 우리는 폭력이 가득한 세계에 살고 있다.
왜 폭력은 사라지지 않을까. 무수히 많은 종류의 폭력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가 경험하는 폭력은 모두 다르다.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의 폭력이 있을 것이다. 폭력을 근절하려면 모든 인간이 지닌 공통점에 뿌리를 두는 구원책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뇌과학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뇌를 가지고 있다. 또한 폭력이 다치게 하는 부위는 몸이 아니라 뇌다.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는 뇌과학을 이용하여 폭력에 대항하는 법을 알려준다. 한국에 사는 어린 학생이나, 키르기스스탄에 사는 나이든 할머니나 똑같이 뇌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대상은 인간 전체다.
책은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Neuro-“는 신경을 뜻하는 접두사다. “Plasticity”란 무엇일까. 플라스틱(Plastic)을 떠올리면 된다. 플라스틱은 열을 받으면 쉽게 형태가 변한다. “Plasticity”는 형태가 변하기 쉬운 성질을 뜻한다. 다른 말로 가소성(可塑性)이라고 한다. 신경가소성은 뇌가 계속 변한다는 성질을 뜻한다. 신경가소성이라는 과학적으로 검증된 개념 덕에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뇌가 계속 변한다는 건 우리가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허황된 희망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과학적으로 진실된 희망을 선사한다.
책의 저자인 제니퍼 프레이저는 신경과학자 마이클 메르체니치의 가르침을 받아 책을 집필한다. 그녀는 구원자라기보다 기쁜 소식을 인간에게 전하는 선지자 즉, 메신저에 가깝다. 뇌가 변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달라질 수 있다고 그녀는 목청껏 외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나는 그녀가 메신저로서의 일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글의 초반부에서는 내가 여태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들었다. 글이 중심을 못 잡고 흐트러져서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저자는 마음-뇌-몸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지 아직도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어색한 번역도 가독성을 떨어트린다. 다음은 책에서 발췌한 문장들이다. 직접 소리 내서 읽어보기 바란다.
스포츠 경기, 무술이나 격투기 연습, 요가나 춤은 신체적 노력은 물론 도전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활동이다.
그는 평생을 자신처럼 학습 장애가 있고 학습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혁신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한 아이들을 구하는 데 바쳤다.
첫 퀘스트 프로그램에서 열여섯 살이었던 내게 당시 교사였던 딘 헐은 자기와 슬로우 댄스를 추자고 제안했다. 끔찍했다. 이를 거절 하자 그는 동급생들 앞에서 내게 뻣뻣하다는 꼬리표를 붙였다.
글이 쉽게 읽히는가? 나는 무슨 뜻인지 한눈에 파악할 수 없어서 문장들을 다시 한번 소리 내서 읽어봐야 했다. 이 문장들은 왜 읽기가 어려운 것일까. 첫 번째 문장은 신체 활동의 종류를 복잡하게 나열했다. “스포츠 경기, 무술이나 격투기 연습, 요가나 춤”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말이 중간에 툭툭 끊긴다. 둘 이상의 사물을 같은 자격으로 이어주는 접속조사 “-나”와 “-이나”가 중간중간에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번역가의 탓이 아니라 필자의 탓이다. 복잡하게 나열되어있더라도 원문 내용을 번역가가 마음대로 수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이다. “…요가나 춤은 신체적 노력은 물론…” 보조사 “-은”이 두 번 반복된다. 같은 조사가 중첩되면 음이 충돌하여 어색하다. 비문은 아니지만 독자를 피곤하게 하는 문장이다. 문장을 직접 고쳐보았다. <스포츠 경기, 무술이나 격투기 연습, 요가나 춤은 신체적 노력과 더불어 도전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활동이다.>
두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우선 문장이 길다. 그러나 독해를 어렵게 하는 주범은 문장의 길이가 아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평생을”이라는 문장 성분의 위치다. “평생을”이 주어 다음에 위치하는 게 어색하다. 다음 문장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는 자신처럼 학습 장애가 있고 학습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혁신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한 아이들을 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평생을”에 호응하는 문장성분은 “바쳤다”라는 서술어다. 호응하는 관계에 있는 성분끼리 가까이 붙어 있어야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원래 문장처럼 “평생을”이 문장의 앞에 위치하면 독자가 글을 줄줄 읽다가 “바쳤다”로 문장이 끝났을 때, 그래서 뭘 바쳤다고? 하면서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문장에서 짚어볼 점은 두 가지다. 우선 “거절 하자”의 띄어쓰기 실수가 불편해보이겠지만 이것은 내 실수가 아니다. 책에 나온 문장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여기서만이 아니라 책 곳곳에서 오탈자가 종종 발견된다. 실수는 언제나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독자는 맞춤법으로 책과 출판사의 노력을 판단한다. 다음으로 “뻣뻣하다”는 표현이다. 저자는 학대 교사의 뻣뻣하다는 표현에 정신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뻣뻣하다는 어휘는 유연성이 부족한 사람에게나 주로 사용한다. 모욕적인 뉘앙스를 전혀 풍기지 않는다. 아마 “Stiff”라는 영어 표현을 뻣뻣하다고 해석한 듯하다. “Stiff”는 뻣뻣하다는 뜻 외에도 재미없는 인간, 시체, (성격이) 모난 등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삐딱하다, 모나다, 혹은 까다롭다가 저자의 의도를 더 알맞게 반영하는 표현이다. 뻣뻣하다는 표현은 저자가 느꼈던 수치심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 되려 저자가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를 입는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원문이 있었다면 자세히 분석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주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The Bullied Brain” 원서를 구할 수 없었다.
글의 구조는 말끔하지 않아도 글의 내용은 훌륭하다. 그래서 더 안타깝다. 글만 깔끔하게 다듬어도 이 좋은 책을 더 많은 사람에게 당당히 소개했을 텐데.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는 단단한 희망을 선물하는 책이다. 희망은 본래 아름답지만 형체가 없다. 하지만 신경과학이라는 강력한 경화제를 바르면 희망이 쇠공처럼 단단해진다. 나는 이번 책을 읽으며 단단한 희망을 얻었다. 달라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책을 만든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