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 클래식 연주자들이 뮤지컬 곡을 부르거나 전자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화려한 퍼포먼스까지 펼치는 일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안드레아 보첼리나 바네사 메이, 일 디보 그룹 같은 클래식 연주법으로 대중음악을 전문으로 공연하는 크로스오버 연주자들이 등장했고, 정통 소프라노 조수미가 드라마나 영화의 OST를 부른다거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영국 ‘로열 필하모닉’이 록 그룹 퀸의 곡을 편곡하여 오케스트라로 공연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클래식 연주자의 외모도 이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유럽과 중앙아시아 경계에 있는 조지아 공화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카티아 부니아티쉬빌리는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관능적인 의상으로 무대에 오르고, 중국 출신의 피아니스트 유자 왕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의상에 살인적인 높이의 하이힐까지 신고 무대에 오른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비판도 상당하다. 클래식은 응당 고상해야 하고 무엇보다 음악의 사운드에 가치를 두어야 할 연주자들이 현란한 의상과 화려한 쇼맨십으로만 관객들을 현혹하려 든다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세상은 급변하고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듯 클래식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평온하다 못해 순식간에 잠들어버리게 만드는 바흐나 헨델의 바로크baroque 음악도 처음 등장했을 당시엔 지나치게 경박하다고 지적을 받았다. 바로크의 어원은 포르투갈어로 바로코barroco,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인데, 당시 이런 음악을 낮잡아 부르는 의미로 ‘바로크’라 이름 붙인 것이다.
평균적으로 보자면 이전의 연주자들에 비해 현재의 연주자들이 훨씬 뛰어난 테크닉을 갖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력이 부족해서 대중음악을 연주하고 화려한 비주얼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보다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며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 시대에 맞는, 때로는 앞서 나가는 진보적 무대를 통해 진화해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요즘 시대 연주자들의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이나 화려하고 과감한 비주얼 경쟁은 머지않은 미래에 ‘뉴 노멀’이 될지도 모른다. 일각의 비판에 주눅 들지 않고 꿋꿋이 앞서가는 연주자들에 의해서 말이다. 파격을 통해 그들은 새로운 스탠더드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악마적 매력을 지닌 비르투오소
“공연 중 그의 발치에는 사슬이 감겨 있었고
'악마'가 나타나 그의 연주를 도왔다.”
— 하인리히 하이네
훤칠하고 깡마른 몸매에 긴 머리를 휘날리며 신들린 듯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탈리아 출신 니콜로 파가니니Nicolo Paganini, 1782~1840에게는 괴소문이 파다했다. “그의 바이올린 실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그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것이다.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공연장에 들어선 관객들은 그의 바이올린이 뿜어내는 마성에 열렬한 팬이 되어버리고, 때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를 듣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까무러치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클래식 연주자들 중에 명인이라 불릴 만한 기교를 갖춘 연주가를 비르투오소virtuoso라 부르는데, 파가니니야말로 클래식 음악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비르투오소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그 누구도 구사하지 못했던 템포와 테크닉으로 연주했기 때문에 관객들에게는 묘기나 마술처럼 보이기도 했다. 모든 면에 있어 이전의 수준보다 월등하게 뛰어났기에 바이올린의 역사는 파가니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해도 무방하다. 파가니니는 4옥타브에 걸치는 넓은 음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음을 하나하나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staccato, 오른손이 아니라 왼손으로 현을 튕겨서 소리를 내는 피치카토pizzicato, 현에 손가락을 가만히 둠으로써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하모닉스harmonics 등 이 모든 다양한 주법은 파가니니가 스스로 창안해 낸 것이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묘사할 방법이 없다.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다 해도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가능한 상형 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 빈 공연 후 신문 논평
파가니니는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 위해 네 개의 현 중 단 두 개의 현만을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어느 관객은 “혹시 현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라며 도발했고 그는 정말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작품을 작곡하게 된다. 그리고 단 한 개의 현만으로도 현란한 연주를 선보이자 그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초절정의 연주 실력에 대한 소문은 물론이고 거기에 무시무시한 괴소문이 덧붙여졌다. 당시의 바이올린은 양의 창자를 꼬아서 만든 현을 사용했는데, 그가 소름 끼치게 연주했던 그 단 하나의 현은 파가니니가 젊은 시절에 애인을 살해하고 그녀의 창자를 꼬아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연주하는 것은 파가니니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소문은 그를 더 신비롭게 만들어주었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사탄의 능력으로 조종되는 연주를 듣고 싶어 했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파가니니는 1회 공연에 현재 가치로 약 1억 원의 개런티를 받기도 했다.
David Garrett as Niccolo Paganini in “The Devil’s Violinist.”
파가니니는 완벽한 연주뿐만 아니라 쇼맨십과 마케팅에도 능했다. 바이올린을 활로 연주하는 대신에 즉석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연주를 시연하기도 하였고, 바이올린으로 동물의 울음소리를 내며 관객의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관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러 줄을 끊고 남아 있는 줄로 더 열정적으로 연주하여 관객을 흥분으로 몰아가는 수법을 썼다고도 전해진다. 당시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이슈 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그가 즐겨 입던 옷이나 장갑, 장신구도 늘 유행을 만들어냈고, 그의 스타일을 본뜬 품목이 시장에 나오면 나오는 족족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테크닉을 더 독보적이고 신비롭게 남기기 위해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았다. 그리고 생전에 출판사로부터 수많은 출판 제의를 받았지만 너무 높은 인세를 요구하는 바람에 계약은 성사되지 못했다. 공연 중에는 즉흥적으로 연주한 곡이 많았는데 출판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악보 또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이루었을 초절정 기교의 테크닉들은 제자나 악보를 통해 내려오지 않았기에 아쉽게도 주변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추측할 수밖에 없다.
Play list
<24개의 카프리스> 작품 1-24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24 Caprice for Solo Violin, Op. 1 No. 24
by Nicolo Paganini
https://www.youtube.com/watch?v=ITzcZia7fsQ
곡명의 ‘카프리스caprice’는 이탈리아어로 카프리치오capriccio라고도 불리며 '변덕스러운’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음악에서는 ‘기발한 발상을 옮긴 곡’을 뜻한다. <24개의 카프리스>는 파가니니가 자신의 연주 기량을 보여주기 위해 직접 작곡한 곡이기 때문에 풍부한 악상과 아르페지오arpeggio, 스타카토staccato, 더블 트릴double trill, 중음 주법double stops, 왼손의 피치카토 등 그가 구현해 낼 수 있는 모든 테크닉이 전부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중 24곡 A장조가 가장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