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버스를 기다렸어요
매번 본인의 옷장을 털어 내게 한 보따리씩 옷을 가져다주는 친구가 있다. 최근 염색을 하고 앞머리를 잘라 그녀와 헤어스타일도 꼭 같아졌다. 그녀가 입던 옷을 입고 비슷한 머리 모양을 하고 나란히 서 있자면 낯선 이들은 우리가 자매인지 묻는다. 원래가 비슷한 두 사람이 만나 친구가 된 것인지, 함께 한 세월과 깊이만큼 서로를 닮아가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두 가지 모두 참이겠지. 10년 가까이 늘 나의 단짝임에도 그녀와 함께 어딘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걸 경부선 터미널에 앉아 김밥을 나눠 먹으며 알게 됐다. 서로가 사는 도시에 방문해 추억을 만들곤 했으나, 이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단 둘이 떠나는 여행은 꼭 처음이었다. 우리는 호반에 앉아 무성 영화를 보고 라이브 음악을 듣는 열대의 밤을 보내기로 했다.
제천 터미널에 내리니 처음 와보는 곳인데도 이미 여섯 번은 와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방 중소도시의 버스 터미널과 그 주변 풍경은 대체로 비슷해서 간판을 떼놓고 보자면 이 곳이 천안인지 제주인지 모를 일이었다.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오늘은 선선하다며 역시 서울보다 날씨가 좋은 것 같다며 잠시간 들떴으나, 이내 오전 11시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허기가 졌다. 중식당에 전화를 거니 40분 뒤에 영업을 시작한다고 했다. 우리는 기여코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며 근처의 편의점에 들어가 땀을 식히며 영업 개시를 기다렸다. 기다림의 끝에는 큰 보람이 있었고, 서울에 가면 3일에 한 번은 생각 날 별미를 두고 법석을 떨었다. 방 안에는 두 테이블이 전부였고, 옆 테이블의 어린이는 굳이 파티션을 넘어와 삐약거리며 날갯짓을 하기도 하고, 우리가 더울까 선풍기를 켜주기도 하다 엄마에게 뒷덜미가 잡힌 채 끌려가기를 반복했다.
자전거 핸들 잡는 것도 무서워하는 우리에게 운전면허가 있을 리 만무하므로,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숙소에 짐을 풀기 위해 버스를 검색했다. 정류장의 전광판에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라리 53분, 65분, 90분의 대기 시간이 있는 다른 버스들을 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90분의 기다림 끝에 결국 당신이 도착할 거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기대보다 조금 늦더라도 결국 당신이 내게 온다는 희망이 있으면 조금은 견딜만하니까. 우리는 오지 않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고, 숙소로 들어가는 버스의 막차 시간이 오후 2시 30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제천의 버스는 극적인 상황을 좋아하는 것인지, 2시 15분이 되어서야 전광판에 14분 뒤 도착이라는 안내를 띄워 주었다. 친구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림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고, 밖에 나와 내내 기다리기만 하다가 무엇 때문에 외출을 했는지 잊어버릴 동네라고 했다. 우리는 귀여운 호호 할머니와 어디서 단체로 맞춰 쓰신 건 아닌지 궁금해지는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과 함께 40분 동안이나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한 두 명의 아가씨가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버스가 도는 방향으로 함께 기울어지고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 상황이 웃기고 귀여워서 우리의 몸이 한쪽으로 쏠릴 때마다 피식피식 미소를 지었다.
물태리 빵집. 오래된 일본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시골 동네의 작은 빵집에 들어왔다. 이 시골에서 갓 구운 빵과 함께 시원한 홍차를 마실 수 있다니. 선곡은 또 이렇게까지 훌륭할 일인지. 볼록한 배를 튕기며 짐을 풀고 낮잠까지 자고 나니 꼭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 아침 밥 먹으라고 깨우는 엄마의 성화에 눈곱도 못 떼고 식탁에 앉은 아이들처럼 잠이 덜 깬 눈을 껌뻑이며 저녁까지 챙겨 먹었다. 큰 호숫가에 도착했다. 분홍빛으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무성 영화 시대의 영웅이 연출하고 연기한 1928년 작 영화가 거대한 스크린 위에 수놓아졌고, 무대 위엔 음악가들이 라이브로 배경 음악을 연주해 주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거대한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에서 사고를 치며 다녔고, 그 와중에도 사랑하는 여인을 위한 순애보를 잃지 않았다. 그의 사랑스러움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어서 호숫가에 앉은 수백 명의 사람들 모두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애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호숫가의 대기는 조금은 후텁했고 모기는 내 다리를 사정없이 물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기 속에서 내가 그토록 영화를 사랑했던 이유가 떠올랐는데, 가수들은 또 노래를 기똥차게 잘해서 오늘은 행복한 날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이의 차를 얻어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친구와 나는 2층 침대의 아래위에 이웃한 채 잠에 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늘 밤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탓인지 쉽사리 들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뒤척이는 기색을 감지하고는 도둑처럼 뒤꿈치를 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주먹 만한 알전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널찍한 테라스에 놓인 소파 하나씩을 차지하고 누워 머리를 맞댔다. 사이좋게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꼈다.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인데 이렇게 떠나버리면 그 숱한 밤들은 어쩌냐며 노래 가사가 우리에게 물었다. 저라고 그걸 알 도리가 있겠나요. 나 또한 누군가를 사랑하며 지새웠던 숱한 밤들을 떠올렸다. 너는 벌써 아버지가 된 것 같고, 당신은 내 욕을 하고 다닌다 들었고, 그대는 새로운 애인과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 휴가를 다녀갔지. 제천까지 와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절로 피곤해져서 드디어 방에 들어가 잠을 청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신들과 나눈 우리들의 밤 또한 참으로 숱하게 아름다웠지만, 오늘 친구와 함께 보낸 이 밤 또한 너무나 아름답고 귀하다고. 제천의 밤도 나의 숱한 추억 중의 하루가 될 테니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겠다고.
다음 날 아침, 시내에 나가기 위해 짐을 싸서 정류장에 갔다. 전 날의 과오를 다시 범하지 않고자 미리 버스 시간표를 받아 두고 야무지게 도착 시간 15분 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는 또다시 하염없이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고, 40분이 흘렀다. 시간표를 잘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골길 위에 멀뚱히 한 시간을 더 서 있을 수는 없으니 또 밥을 먹었다. 대학시절 단편 영화의 스탭과 배우로 만나 함께 영화를 꿈꾸었던 우리는 영화제에 방문해 영화는 내던져 둔 채 밥이나 알차게 먹으며 다녔다.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사는데 버스가 쌩하고 지나갔다. 친구는 총알처럼 뛰쳐 나갔고 나는 거스름돈을 마다하며 따라 나갔다. 슈퍼 사장님은 태연하게 아직 출발 시간 남았다며 여유로이 거스름돈을 챙겨 주셨고, 우리는 이 버스가 시내에 나가는 버스가 맞는지 거듭 확인을 하고서야 버스에 탑승했다. 또다시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40분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 급회전을 할 때마다 다시 우리의 몸이 한쪽으로 쏠렸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 상황의 우리가 너무 귀여워서 또다시 피식피식 웃어버렸다.
서울에 돌아와 여름 내 그을린 나의 팔을 바라본다. 이 정도로 어두운 빛의 내 피부를 본 적이 없다. 올해의 이 폭염 속에서의 나는 작렬하는 태양 아래를 대차게 걸었다. 생전 입지 않던 소매 없는 티셔츠를 유니폼처럼 입고서 성큼성큼 걸어가며 나의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냈다. 길을 걷다 과거를 마주하고 추억으로 남겨둘 용기를 내기도 했고, 이미 유령이 된 줄 알았던 이가 살아 돌아와 내 앞에 서있기도 했고, 잠시 멈춰 앉아 말간 얼굴을 한 젊은이들과 빨대 꽂은 커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소다 맛이 나는 얼음과자를 물고 공원에 앉아 있으니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고 귀뚜라미만 사방에서 귀뚤귀뚤한다. 귀뚜라미도 추워서 귀가할 쯤엔 또 다른 여행을 하게 될 테고, 우리가 제천에서 마주한 밤 못지않은 또 다른 그윽한 공기에 매료되겠지. 여름을 지나 보내고서 다시 무대로 돌아가려 하는 내 동무도, 강남과 신림을 오가며 밥벌이를 하는 나도, 씩씩하게 삼각대를 들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찍는 버스터 키튼도, 그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말간 표정을 짓는 당신들도 우리의 여름밤을 종종 떠올리며 웃자. 그 숱한 밤들 중 우리 함께 공유한 밤이 분명 거기 있지 않았느냐고. 덥고 목이 말랐어도 함께여서 조금은 덜 고되지 않았느냐고.
가장 좋은 건 꿋꿋하게 기다리니 버스는 꼭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것! 서울과 제천의 열대야에 우리가 함께여서 나는 너무나 감사하고,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