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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책방 Dec 23. 2020

12월엔 밤이 금방 와. 아이는 금방 어른이 되고.

집에서 병원 갈 때 한 시간, 병원에서 한 시간, 병원에서 집에 올 때 한 시간. 바깥에 있는 세 시간이 내가 세상에 부유해있던 시간이다.

여덟 시간 잔다고치고 16 시간을 깨어있는다고 했을 때 그 시간 동안 먹고 씻고 화도 내고 티브이도 보고 책도 읽고 울기도 하는데, 그중 세 시간을 오로지 병원 가고 오는 길에 쓴다는 게 좀 커 보였다.

세 시간 동안 난 아무 생각 없이 걷거나 서서 핸드폰을 보면서 세상에 부유해있었다. 특히 지하철 타고 갈 때 더욱 그런 느낌이었는데, 내가 탄 공항철도는 역간 거리가 넓고 빠른 속도로 다녀서, 사실은 엄청난 속도로 부유한다고 느꼈다.

12월 오후 5시 30분부터 6시에는 밤이 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나는 이 시간에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가로등이 아직 켜있지 않거나 이제 막 키는 시간. 사물이, 세상이 어둠에 쌓여가는 걸 이렇게 선명하게 보는 게 좋다. 그 시간만큼은 지구가 공중회전을 하는 게 느껴지는 것 같다. 지구의 회전 속도에 밀려 나는 어둠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그래서 소설 쓸 때 필명을 반야라고 한 거다.)

크리스마스 롤 케이크를 사고(왠지 비싼 케이크 사기 싫었다) 집에 와보니, 배송 주문한 뱅쇼가 왔다.   내일은 하프셀이라고 부르는 세척하고 반만 열려서 오는 굴이 올 것이다. 모두 처음 사보는 것들이다.

신랑은 한 달 동안 집에 자정 이전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오늘 밤 라디오스타에는 원년 MC들이 게스트로 나와서 오랜만에 재밌을 것 같은데, 신랑과 함께 보고 싶다.

신랑이라 부르는 게 좋다. 랑 할 때의 울림이 부드럽고 함께라는 뜻으로 ‘~랑’ 쓰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그러고 보니, 신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지칭할 때 뭐라 부르는지 궁금하네. 아내? 부인? 성미? wife?(와이프는 꼭 나이프 같아서 미스터리 범죄 스릴러 주인공 같아. 영화 나를 찾아줘 주인공처럼.)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용서 안 한 것 같고, 왜 이렇게 용서했다, 다시 미워하는 것이 쉬운지. 가족이란 참 용서하기도 쉽고 미워하기도 쉽고. 아니, 다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왜 조그마하고 약하고 힘이 없을 때에 함부로 했는지. 자식들이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본인이 늙고 힘이 빠질 거라 생각하지도 못한 것 같다. 아무래도 아버지 때문에 약자에게 함부로 하거나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못 견딜 정도로 크게 분노하는 듯하다. 아마 내가 지금보다 더 힘을 가졌다면(돈이든 명예든 뭐든), 더 지독하게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처벌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다행인지 지금은 나 혼자 건사하기도 어렵다. 수술과 회복의 나날은 천만다행으로 내 기운을 뺏어, 아무도 해치지 않게 했다.

나는 가끔은 순전히 재미로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심지어는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게, 가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다. 더 뭔가를 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도 일종의 나르시시즘 같다. 미시마 유키오의 나르시시즘과 다자이 오사무의 자기혐오가 동시에 날 강하게 이끌고, 그 두 기제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극심한 자기혐오를 즐기면서, 혐오의 순간 나를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지점에 가져다 놓는다.

그러다 나의 연인, 내 신랑과 같이 있으면서 얘기를 나눌 때는 혐오도 나르시시즘도 사라지고, 마음을 나누는 과정에 집중하게 된다. 본인이 키우는 식물을 바라보는 신랑, 그 신랑을 바라보는 나. 나는 TV 속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듯 신랑을 가만히 지켜본다. 무슨 생각을 할까?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걸까?

어젯밤에 글쓰기 관련 책을 쓰다가 짧은 소설을, 여자가 남자를 사랑한다고 착각했다가 갑자기 한 순간에 마음이 식어버리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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