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칸 남겨두기

창조적 뇌를 깨우는 법 12화.

by 무이무이

여러분 늘 한가위만 같으시길 바랍니다.

창조적 뇌를 깨우는 법 11화 빈칸공포증 편의 빈칸을 채워주신 모든 구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 전하면서 빈칸으로 향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몇 글자 더해봅니다.


오래된 일기장의 공백


오랜만에 오래된 일기장을 꺼냈다.
표지는 먼지로 희미하게 덮여 있었고, 손끝으로 살짝 쓰다듬자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그런데 일기장을 넘기자 날짜만 덩그러니 적혀 있을 뿐, 아무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한 페이지.

나는 숨을 죽이고 그 빈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그 페이지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도대체 그날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전날 전전날, 다음 날과 다다음날의 일기를 뒤적이며 단서라도 찾으려 애썼지만,
그 빈칸은 마치 내 기억을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집어삼키려는 블랙홀 같았다.

사진첩을 펼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웃고, 뛰고, 사랑했던 순간들이 찰나의 프레임으로 박혀 있는데,
이빨이 빠진 듯 사진한 장이 없다.
중요한 날이었을 것 같은데, 그 장면이 사라진 것이다.
마치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그 순간, 나는 내 삶의 일부가 지워져 버린 기분이었다.




빈칸의 공포


우리는 늘 빈칸을 두려워한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면, 머릿속에는 불안이 스며든다.
그 침묵이 길어지면, 우리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내뱉으며 그 틈을 메우려 한다.

노트 속 남은 여백이나 벽에 남은 흰 공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 빈칸을 두려워하고, 그 자리를 무엇인가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느낀다.
마치 삶의 의미 자체가 그 여백 속에 숨겨 있는 것처럼.


달력의 하루가 비어 있으면, 손가락이 간지럽다.
그날 약속이 없다는 사실이 작은 불안을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채우고, 할 일을 빽빽하게 적고, 목표를 쌓아둔다.
빈칸은 “나는 의미 없이 흘러가는 하루를 살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우리는 늘 공백을 메우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빈칸을 남겨두는 용기는 거의 없었다.
남겨둔 순간, 그곳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않은 날, 전화가 오지 않는 날,
서로 할 말이 없어 대화가 끊긴 순간.
우리는 그 공백이 두려워, 메시지를 보내고, 안부를 묻고, 무언가를 채우려 한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야말로, 서로의 진심이 숨을 쉬고 자라날 수 있다.
그 공백을 견디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며 삶의 빈칸을 가득 채운 듯 착각한다.
화려한 필터와 웃음 속에는 현실이 숨겨져 있다.
하지만 화면 속 삶과 실제 삶 사이의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

우리는 그 간극을 무시하고, 또다시 사진과 기록으로 공백을 메우려 한다.
그때마다 나는 묻는다.
이 공백을 채우지 않고 견디면, 무엇이 생길 수 있을까?



빈칸을 남겨놓자


이제 말할 수 있다.
빈칸이 있다는 건 단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곧 그 자리를 더 중요한 것으로 채울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늘 공백을 채우려고 애써왔지만,
그 공백을 남겨둔 순간에야
삶의 진짜 의미, 진짜 즐거움, 진짜 사랑이 들어올 여지가 생긴다.

그러니 빈칸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 공백은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반드시 올
중요하고 가치 있는 순간을 위한 자리이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놓치는 것들이 있다.
굵은 알갱이들만 채우다 보면, 작은 틈이 생긴다.
그 틈을 남겨두어야 훗날
작고 소소한 행복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처음부터 그 빈틈까지 채워버리면,
행복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 빈틈은, 행복을 창조하는 작은 창문이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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