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있다? 없다?

정답을 강요받아온 인간에게

by 무이무이


우리는 왜 답을 맞히는 데 집착하게 되었을까


우주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기본 입자들이 공유하는, 가장 미세한 성질.
스핀 1/2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 5화 : 스핀이라는 이상한 회전: 불확정성의 근원》읽어보기 -

이 세계는 애초에 확정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입자는 관측되기 전까지 동시에 여러 상태로 존재하고, 세계는 결정된 답을 품고 있다기보다 가능성들의 중첩 위에 조심스럽게 얹혀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오랫동안 싸워왔던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은 조금 우스워진다.

확정되지 않은 우주를 두고 “처음부터 설계되었느냐”, “점진적으로 만들어졌느냐”를 따지는 일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결론을 두고 결말을 스포 하는 행위에 가깝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묻는다. 맞냐, 안 맞냐. 있냐, 없냐. 정답이냐, 오답이냐.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답을 맞히는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시험에는 정답이 있었고, 정답을 맞히는 사람만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었다.
수학 공식은 정확한 답을 요구했고, 그 정확함 덕분에 우리는 다리를 놓고, 도시를 세우고, 물질세계를 구축해 왔다.

문제는 우리가 그 방식에 너무 익숙해졌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착각하게 되었다.

마치 이 세계 자체에도 언제나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것처럼.

하지만 불확정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답을 맞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사실 정답을 얻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수많은 가능성들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평균값, 가장 편리한 근사치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 평균값은 실용적일 수는 있어도 진리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임시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평균값을 ‘정답’이라 부르고, 그에 반대되는 모든 가능성을 ‘오답’이라 밀어낸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우주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 하나를 의식 위로 불러올 뿐이다.

신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신을 떠올리는 순간, 신은 이미 인간의 의식 안에 들어온다.
그렇다면 그다음 질문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왜 우리는 신을 떠올릴 수 있는 우주에 살고 있느냐”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을 거꾸로 던진다.
신이 있으면,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신이 없으면, 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미신에 빠진 자가 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신이라는 개념을 두고 논쟁하는 순간, 신은 이미 ‘있는 세계’와 ‘없는 세계’ 사이의 불확정성 위에 놓인다.


외계인도 마찬가지다.
우주가 넓으니 당연히 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확률적으로 인간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모두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확정되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을 뿐이다.


이제 이 관점으로 성경의 가장 오래된 장면을 다시 보자.

창세기에서 인간의 의식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는 장면이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은 도덕을 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방법론에 대한 경고에 가깝다.

선과 악.
있다와 없다.
맞다와 틀리다.

이 이분법을 함부로 먹지 말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불확정성의 세계에서 인간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오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을 성급하게 재단해 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간이 스스로 쥐겠다고 선언하는 행위다.

그러나 이 세계는 처음부터 인간의 판결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답을 맞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가능성 사이를 탐색하며 잠정적인 평균값 위에서 잠시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의 의식이란 정답을 선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 사회 안에서 늘 정답을 요구받으며 살아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누가 맞고 누가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가려야만 안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옳음’이란 깊이 들여다보면 거의 언제나 보편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편의상 선택한 것, 다수가 동의한 규칙, 그 평균값 위에 얹힌 합의.

그것이 옳은 것이 되고, 그에 반대되는 것은 그른 것이 된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선과 악의 개념을 너무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만 사용해 왔다는 데 있다.


권선징악.
선은 보상받고, 악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이야기.
이 서사는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데 꽤 효과적이었다.
서로를 배려하면 살기 좋아지고, 배려하지 않으면 구조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려는 선이 되고, 이기심은 악이 된다.

여기까지는 깔끔하다.

하지만 이 공식이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갑자기 멈춰 서게 된다.

사자를 보자.
사자는 매일 학살을 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무 죄책감 없이 생명을 죽인다.

그런데 우리는 사자를 악하다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자가 먹지 않으면 사자는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법칙이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드러난다.
인간은 더 이상 생존 본능에만 매달려 살지 않아도 되는 존재라는 점이다.

우리는 굳이 직접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살생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우리는 매일 누군가가 대신 죽인 생명을 식탁 위에서 만난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 구조 안에서는 이미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흔히 자신을 향해 말한다.
“나는 옳게 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타인을 향해 말한다 “저 사람은 잘못 살고 있다.”

이 지점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조금 우스워진다.

우리는 모두 같은 구조 안에 있으면서 각자 다른 위치에 서 있을 뿐인데,
누군가는 판사가 되고 누군가는 피고인이 된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는 아주 묘한 말을 남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은 죄가 없다는 사람을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애초에 없다는 선언에 가깝다.

이 말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정죄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 선과 악을 가르는 일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무너질 때 불편해지는 구조를 조정하는 일뿐이다.

법은 도덕이 아니라 유지 장치에 가깝다.
윤리는 진리가 아니라 공존을 위한 임시 규약이다.

우리는 선과 악을 판단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불확정성 속에서 서로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기 위해 규칙을 만들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우리는 가장 위험해진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타인을 틀렸다고 규정할 권리가 손에 쥐어졌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세계를 너의 기준으로 확정하지 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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