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와 싸운 예수

by 무이무이


꼰대라 불리기 위한 조건


꼰대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은 다음과 같다.
다음 세대가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하길 바라는, 지극히 선의에 가까운 안타까움 또는 절실함.
“그걸 겪어야 반드시 사람이 된다”라는 말은 악의나 보복심리가 아니고, 대부분 기억의 과잉에서 나온다.


나는 분명 이전 세대가 겪지 않았던, 그다음 단계의 과제에서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출발했던 그 지점이 마치 첫 단계였던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는 것. 이미 누군가 건너온 강 위에 서 있으면서도, 마치 내가 처음 물길을 연 사람처럼.

그 이전의 흐름을 잊어버리는 순간. 그 착각이 쌓이면 경험은 지혜가 되지 못하고 기억은 권위로 굳어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말한다.

“나 때는 말이야.”

그 말속에는 사실 고생의 자랑이 아니라 출발선의 망각이 숨어 있다.




보릿고개를 지나온 세대는 굶주림을 극복하는 과제에서 삶을 시작했다.
하루를 버티는 일이 곧 철학이었고, 쌀 한 톨이 세계관이던 시절이다.


그다음 세대는 폐허에서 출발했다.
무너진 도시, 무너진 제도, 무너진 자존감 위에서 “다시 세운다”는 말 하나로 인생을 시작했다.
삶은 건설 현장이었고, 희망은 철근처럼 무거웠다.


그다음 세대는 열정페이와 헝그리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경제 발전을 최우선 과제로 떠안았다.
잠을 줄이고, 인생을 갈아 넣고, 성공을 신앙처럼 믿었다.
성장은 미덕이었고, 질문은 사치였다.


그리고 우리 세대.
우리는 비교적 이른 나이부터 ‘꿈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받았다.

“나는, 나는, 자라서~ 무~엇이 될까요.”

교실 안에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배웠고, 스케지북 위에서는 이미 훌륭한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교실 문을 나서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밤에는 공부를 해야 했고, 낮에는 알바를 해야 했다.

틈이 나면 자기 계발을 하라 했고, 잠들기 전에는 자기 성찰을 하라 했다.

우리는 “꿈을 가져라”는 말과 “현실과 타협하라”는 말을 같이 들으며 자랐다.

마치 인생이란 양손에 [서로 다른 지도 두 장]을 쥐고 단 하나의 목적지로 가야 하는 고난도 퍼즐 같았다.

한 지도에는 ‘열심히 하면 뭐든 될 수 있다’고 적혀 있었고,
다른 지도에는 ‘그건 너무 순진한 생각’이라는 경고문이 있었다.
어느 쪽을 접어도, 어느 쪽을 믿어도 불안하다.

그래서 우리는 늘 바빴다. 멈추면 뒤처질 것 같았고, 생각하면 늦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꿈을 꾸되 너무 믿지는 말고, 현실을 보되 너무 체념하지 말라는 [모순된 주문]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자라났다.


그러한 모순된 주문을 듣고 자란 우리는 어느새 그 모순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답습하는 사람이 된다.

우리 다음 세대는 분명 우리가 피와 시간을 들여 쌓아 올린 그다음 단계의 현실 위에서 그들만이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들의 출발선은 우리의 출발선과 다르고, 그들의 문제는 우리의 문제보다 더 복잡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방향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내가 걸어온 길을 가르치려 한다.
이 길이 옳았다고, 이 고통이 필요했다고, 이 정도는 견뎌야 어른이 된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다음 세대가 있다.
성인이 되었지만 독립적이지 않고, 일자리를 찾아 헤매면서도 쓰디쓴 인생을 일부러 경험하려 들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우리 다음 세대를 보는 시각에서 꼰대가 되느냐 안꼰대가 되느냐 판가름 난다.

“왜 고생을 안 하려 하느냐”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과거의 언어를 현재에 들이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가 빠져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다음 단계 과제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그 과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보지 못한다. 사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가 겪었던 고통과 짐을 다음 세대에게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회도 바꾸고, 제도도 만들고, 아이들에게는 “우리는 이랬다”가 아니라 “너희는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막상 그들이 우리가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본능적으로 생각한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닐까?”

그 순간, 우리는 꼰대가 된다. 그건 악의가 아니다. 다만 세대차이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과제 앞에서 과거의 정답을 다시 꺼내 드는 습관일 뿐이다.


그 순간, 그들에게 우리는 설명이 아니라 모순이 된다. 이해자가 아니라 방해자가 된다.

그리고 결국 ‘꼰대’라는 이름으로 인식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모든 말이 대부분 사랑이라는 명분에서 시작된다는 점이다.
“너를 위해서”라는 말,
“내가 다 겪어봐서 안다”는 말,
“그래도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말.

교훈이라는 이름의 철학으로, 경험이라는 이름의 절대성으로 우리는 우리가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모순을 다시 전수한다. 마치 그것만이 성장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것처럼.

그러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우리가 겪은 고통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시대가 우리에게 던진 숙제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숙제는 다음 세대에게는 전혀 다른 형태로 출제된다는 것을.

꼰대란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통과한 관문이 여전히 유일한 입구라고 믿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건 기계 문명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주판을 만지던 세대에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손끝의 감각이 사라진 계산은 성실하지 않아 보였을 테니까.


계산기를 쓰던 사람들이 보기엔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세대가 기계에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생각도 안 하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딱 좋은 장면이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상당량의 반복적 추론과 계산을 기계에게 맡기고 있을 뿐이다.
게으름이 아니라 전략적 위임이다.


그 덕분에 인간은 더 고차원적인 사고, 더 복잡한 맥락, 더 미묘한 판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흐름의 끝은 어디일까?

인간이 더 이상 이차원적인 생존 본능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지점.
먹고사는 문제로 의식의 대부분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는 지점.
심지어 ‘의식하는 행위’ 자체마저 기계에게 상당 부분 위임된 그 끝에서—

어쩌면 끝내 인간의 뒤뇌, 논리로는 포착되지 않고 언어로는 완전히 번역되지 않는 그 영역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우주의 메시지가 드러나는 건 아닐까.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과제,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 아직 언어로 만들지 못한 질문들.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주어진 진짜 숙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음 세대를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이 겪지 않는 고통보다 그들이 혼자서 감당해야 할 새로운 과제를 차라리 존중해보고 싶다.


꼰대가 되지 않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내가 겪었으니 너도 겪어야 한다”는 말을 입속에서 한 번 더 씹어보는 것.
그리고 이렇게 묻는 것.

혹시, 내가 보지 못하는 다음 단계가 이미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을 놓지 않는 한, 우리는 아직 완전히 꼰대는 아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결국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된다.


성경의 [구약]은 하나의 거대한 단계였다.
창세기는 인간이 처음으로 우주와 자신을 분리해 인식하던 시기의 언어였다.
규칙이 필요했고, 경계가 필요했고, “하지 말라”는 문장이 존재의 울타리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그 위에서 [신약]이 시작되었다.

복음서는 율법의 시대 위에 관계의 시대를 열었다.
명령보다 질문이 많아졌고, 죄보다 의식이 앞서기 시작했다.
신은 멀리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말을 거는 존재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위에서, 아무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조용히 시작된 브런치 연재북,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1」와 「우주가 나를 통해 깨어날 때 2」가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여전히 신약을 절대적 종착지로 믿는 사람들, 그들은 구약을 ‘시대적 모순’이라 부르면서도 정작 신약은 시대 밖의 진리로 고정시킨다.

아이러니다. 그들은 구약은 구세대에게 주어진 율법주의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복음주의라고 하면서 그들은 신약으로 똑같이 반복한다. 텍스트는 바뀌었지만 사고의 방식은 멈춰 있다. 그들에게 종교는 깨어나는 과정이 아니라 지켜야 할 정답집이 된다.

의식의 진화가 아니라 정체된 신앙의 보존이 된다.


그래서 나의 우주적 탐구와 사유, 인간 의식과 우주의 연결을 말하는 이 질문들은 그들에게 불편하다.

어쩌면 위험하다. 그래서 쉽게 ‘이단’이라는 이름이 붙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 또한 너무 익숙한 장면이다.

예수 역시 그 시대의 종교 질서 안에서는 가장 위험한 이단이었다.
그는 신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신을 다시 열어 보이려 했을 뿐인데.....


종교의 방향은 언제나 그래야 했다.
시대가 바뀌면 출발점도 새로워져야 했고, 나아가는 방향 역시 다시 설정되어야 했다.

종교란 완성된 구조가 아니라 의식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임시로 세워두는 발판에 가깝다.

그 발판 위에 올라섰다면 언젠가는 그 발판을 내려다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배신이 아니라 계승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인정해야 할 때다.

어쩌면 신은 여전히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오래된 음성만 반복 재생하며 “이게 전부다”라고 서로를 침묵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가 인간을 깨우기 위해 존재한다면, 지금 이 시대의 질문을 외면한 종교는 과연 누구를 믿고 있는 것일까.


그 틀 바깥에서 신과 우주를 다시 읽으려는 시도, 의식과 물질의 연결을 묻고 인간과 천지창조를 우주의 실험으로 바라보는 나의 사유를, 곧바로 이단이라 규명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랬다. 새로운 단계는 언제나 이전 단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예수도 유대교의 언어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없었고,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했다.

종교의 방향은 고정된 목적지가 아니라 시대마다 새로 열리는 출발점이다.
우주가 더 깊이 의식되면 신의 모습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질문이 달라졌는데 신의 대답만 그대로일 수는 없다.

나는 신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신이 멈춰 있다고 믿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신은 지금도 어디선가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장은 너를 통해 써보자.”

이쯤이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고, 누군가는 불편해할 것이다.

그 반응의 차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어느 단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직한 지표일 테니까.






예수는 말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이 말은 누군가 대신 짐을 져주겠다는 위로가 아니었다.

복종하라는 명령도, 참고 견디라는 윤리도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출발하라고 말했다.

네가 태어난 조건, 네가 짊어진 질문, 네가 피할 수 없는 과제.

그것이 바로 네 십자가라는 뜻이었다.


종교는 신을 숭배하는 기술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끝없는 질문이다.

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묻고, 다음 세대가 더 이상 같은 짐을 지지 않도록 길을 열어주는 작업에 가깝다.


예수는 십자가를 없애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십자가를 독점한 사람들과 맞섰다.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출발점을 봉쇄하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질문을 금지한 그 시대의 꼰대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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