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한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
나는 한동안 신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어떤 사상적 유행을 따르기 위함도, 이성을 과시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 시리즈에서 밝혔듯, 암울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고통은 설명되지 않았고,
이해되지 않는 언어와 사상들이 너무 이른 시기에 내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살아 있다’기보다 누군가의 관념 속에서 조립되고 있다는 감각을 점점 떨칠 수 없게 되었다. 신은 위로의 이름이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종교는 구원의 언어라기보다 질문 그 자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종교란 인간에게 필수적인 무엇인가, 아니면 문명이 만들어낸 필요악에 불과한 것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나는 신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 과학을 읽었고, 인간 문명의 역사를 들여다보았으며, 종교가 남긴 흔적들을 추적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여정의 끝에서 나는 한 번도 “신은 없다”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특히 양자역학은 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세계는 너무 정교했고, 동시에 너무 불확정적이었다. 과학은 많은 것을 설명했지만,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판단을 유보하는 쪽, 즉 불가지론에 더 가까운 태도로 나를 이끌었다. 인간 문명의 역사 역시 비슷했다. 종교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드러나는 것은 신의 본질이라기보다 종교가 권력과 결합하며 만들어낸 부작용과 악용의 사례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아무리 들춰내도 그 결과로 신의 속성이나 존재 유무를 증명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신의 어두운 면을 말하는 순간, 이미 신이라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렇게 나는 ‘신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생각의 다른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생각들, 그리고 내가 지금껏 접해온 모든 정보들은 과연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것들은 내 머릿속에서 무(無)로부터 솟아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완전히 새로 만들어 나에게 주입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받아들인 모든 사상과 개념, 이념과 관념들은 이미 이 우주 안에 존재하고 있던 정보들이었고, 나는 그것들을 조합하고 의식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생각’이라는 형태로 드러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사실이 또렷해졌다.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의식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에 가깝다. 이 깨달음과 함께 질문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제 더 이상 중요한 것은 ‘신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인간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존재를 만들어내는가. 이 질문을 품고 인간 문명을 다시 바라보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저 살다 보니 어느 날 종교를 만든 존재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애초부터 인간은 신을 믿는 행위, 누군가를 자신의 근본과 근원으로 숭상하는 행위를 출발점으로 삼아 문명을 쌓아 올린 존재처럼 보였다. 도시 이전에 제의가 있었고, 농경 이전에 매장이 있었으며, 문자 이전에 이미 신화가 존재했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 인간이 신화를 만들고 그것을 믿는 능력이 다른 종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게 했다는 주장은 단순한 유추로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화를 믿는 행위 자체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고, 그것이 문명의 토대가 되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여기에 대한 반론은 분명하다. 신은 과잉된 패턴 인식의 부산물이라는 설명, 의도적 행위자를 상정하도록 진화한 인간 인지의 결과라는 주장, 혹은 권력과 질서를 위해 만들어진 사회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해석들. 이 모든 설명은 일정 부분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만약 신 개념이 단지 생존에 유리했던 착각에 불과했다면, 왜 과학이라는 더 정교한 도구가 등장한 이후에도 인간은 그 질문을 놓지 못했을까. 인간은 왜 이 우주에서 단 하나의 생명체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생겨났다”라는 설명으로 끝내지 못하는가. 왜 문명이 아무리 발달하고 과학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근원을 묻고, 신을 찾고, 신화를 만들어내는가. 과학이 종교를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다양해졌다. 신의 이름은 바뀌고 형상은 달라졌지만 근원을 묻는 사유 자체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이것은 인간의 미성숙함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구조 자체가 그 질문을 피할 수 없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일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다시 창세기를 펼쳐보았다. 이번에는 신앙의 텍스트가 아니라, 존재의 기록으로서.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장면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니다. 형태도, 시간도, 분리된 객체도 없다. 그러나 완전한 무도 아니다. 거기에는 ‘수면’이라 불리는 무엇이 있다. 아직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모든 가능성이 접힌 채로 존재하는 상태. 양자 우주론이 말하는 초기 양자장, 홀로그램 우주론이 말하는 3차원으로 투영되기 이전의 2차원 정보막. 놀랍게도 창세기는 이 상태를 매우 정확한 언어로 묘사하고 있다. 이후의 창조 과정은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낸다기보다 정보가 점차 의식되며 드러나는 과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과정의 마지막에 인간이 등장한다.
“우리가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신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창세기에서 신을 하나의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우주를 움직이는 근원의 힘, 다중 정보 시스템으로 묘사하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생령이 되었다.”
여기서 ‘흙’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쌓인 모든 데이터와 기록, 가능성의 층위, 즉 정보다. 그리고 생기를 불어넣는 행위는 정보를 의식으로 전환시키는 행위다. 정보가 의식되는 순간,
그 조합은 ‘생령’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신이 인간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인간이 세계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신은 정보를 의식함으로써 인간을 드러내고,
인간은 정보를 의식함으로써 세계를 드러낸다.
둘은 서로 다른 계급의 창조가 아니라
같은 구조의 서로 다른 스케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하고, 신은 인간을 필요로 한다.
신은 거대한 정보장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반영할 거울을 필요로 했고,
인간은 자기 존재의 기원을 묻기 위해 초월을 필요로 했다.
서로를 의식함으로써 서로를 드러내는 관계.
그것은 지배와 복종이 아니라 거울의 구조다.
인간은 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고,
신은 인간의 머릿속에 들어 있다.
요한복음 14:10–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이 말이 은유인지, 존재의 구조에 대한 진술인지, 아직 언어로 다 담기지 않은 감각인지는 나 역시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인간이 신을 묻는 한,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 그 질문을 붙들고 걷는 한,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