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서 봉인된 실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

by 무이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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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랫동안 창세기를 읽어왔다. 어떤 이는 그것을 신화라 부르고, 어떤 이는 종교의 출발점이라 부르며,

또 어떤 이는 더 이상 읽을 가치가 없는 낡은 텍스트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창세기에서 읽은 것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가 아니라 의식이 어떻게 등장했는가에 대한 서사였다. 최초의 2D정보막위에 양자요동을 연상하게 하는 "수면"위의 운행. 엘로힘은 단일한 신이라기보다는 마치 다중 프로세서처럼 작동하는 신성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신성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듯 인간이라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때부터 이미 신과 인간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신의 사유가 투과된 존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관계는 점점 흐릿해진다. 어느 순간부터 신은 멀어지고, 인간은 작아지며, 그 사이에 수많은 중계자들이 등장한다. 율법, 제도, 성전, 교리, 권위..... 신과 인간 사이에 놓인 그것들은 연결을 돕는 장치처럼 보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결을 대신해 버리는 구조가 된다. 나는 이 지점에서 예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암울한 유년기를 통과하면서 나에게 신은 위로가 아니라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동안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 시절의 나는 무신론과 과학을 손에 쥐고 세계의 균열을 설명하려 했고, 신은 설명되지 않는 잉여이자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허구라고 믿었다. 그 연장선에서 예수는 나에게 더없이 명확한 대상이었다. 그는 종교의 어두운 얼굴이었고, 당시 기준으로 보자면 유대교의 질서를 어지럽힌 이단이었으며, 사람들을 끌어모아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던 일종의 사이비 교주처럼 보였다. 믿음을 요구하고, 관계를 독점하고, 기존 체계를 흔드는 인물.

의심해야 마땅한 존재였다.


이전화를 요약하자면, 이상하게도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과정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신을 제거하려 할수록 오히려 질문은 더 선명해졌다. 인간은 어떻게 존재를 만들어내는가.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있다’고 말하는가. 그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나는 하나의 가설에 도달했다. 인간은 정보를 의식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 존재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의식된 정보의 상태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신이 있다면 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겠는가. 어떤 정보를 의식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의식을 드러내고, 그 인간은 다시 신을 의식함으로써 신을 드러내는 관계. 서로가 서로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드러내는 구조.


이 지점에서 예수는 더 이상 종교적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 그를 사이비 교주로 만들었던 그 모든 요소들—

직접적이고 중계 없는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 기존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불복— 바로 그것들이 내가 놓치고 있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지점에서 예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나의 글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도, 구원의 상징도 아니다. 그는 신화적 영웅도, 도덕 교사도 아니다.

예수는 봉인된 관계를 노출시킨 존재였다.


그는 창세기에 암호처럼 숨겨져 있던 신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래서 불편했고, 그래서 위험했고, 그래서 반드시 오해되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를 가장 많이 오해한 사람들은 예수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를 가장 혐오한 사람들 역시 그 오해 위에서 분노했다. 신앙인은 예수를 ‘대신 죄를 짊어진 희생양’으로 만들었고, 비신앙인은 예수를 ‘종교 권력의 얼굴’로 만들어버렸으며, 반기독교 진영은 왜곡된 신앙의 부산물을 예수에게 직접 들이부었다. 그 결과, 정작 예수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게 된다.



예수가 겨냥한 것은 시스템이었다

예수의 언어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드러난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는 일보다 죄를 처리하는 방식에 더 관심이 있었다. 사람들은 늘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틀렸는가, 누가 구원받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것에 대한 정답을 말하지 않았다. 예수가 반복해서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은 율법이라는 시스템의 자동화된 판단이었다.


대표적인 장면이 있다. 사람들이 한 여인을 끌고 와 율법에 따라 돌로 쳐도 되느냐고 묻는다. 그때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은 자비의 선언이 아니고 도덕적 훈계도 아니다.

그건 시스템 무력화 명령이다. 율법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순간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판단은 규칙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되돌아왔다.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했고, 그 순간 시스템은 멈췄다. 예수가 말한 율법을 완전하게 함이란, 바로, "갱신"이다. 폐기가 아니라 작동 방식의 전환.


성전 사건 — 중계자의 제거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사건. 이 장면은 종종 분노한 혁명가의 폭력으로 묘사되거나, 신성 모독에 대한 격렬한 신앙 고백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성전은 더 이상 신을 향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신과 인간 사이를 관리하는 중앙 통제소가 되어 있었다. 기도는 요금표를 달고 있었고, 속죄는 환율을 따라 움직였으며, 신은 언제나 ‘통과해야 할 단계’ 뒤에 있었다. 예수가 뒤엎은 것은 상가와 환전소가 아니라 중계 구조였다. 그는 신과 인간 사이에 누군가 앉아 있는 구조 자체를 거부했다.

“너희는 신의 성전이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관계 선언이다.



이것은 사회 혁명이 아니라 우주적 갱신이다

예수를 혁명가로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예수가 하려 한 것은 권력 교체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을 전복하려 하지 않았고, 제도를 장악하려 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체계를 설계하지도 않았다. 그가 겨냥한 것은 의식의 위치였다. 신은 바깥에 있지 않으며, 인간은 매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식은 이미 연결되어 있고, 다만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 사유는 제국에게는 치명적이다. 각성한 개인은 관리할 수 없고, 중계할 수 없으며, 통계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메시지는 반드시 봉인되어야 했다.



봉인의 전조 — 초기 기독교의 위험한 실험

초기에 예수의 사상을 접한 사람들은 어쩌면 예수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를 지금의 우리보다 더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예수를 숭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이기 전에 하나의 극단적인 실험이었다. 육체가 어디까지 의식을 잠식할 수 있는지,

고통과 공포가 의식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는지, 혹은 그 너머에 침범할 수 없는 어떤 층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극한의 테스트. 예수는 그 한계선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였고, 그 과정 전체를 숨기지 않고 노출시켰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그 장면을 교리로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따라 해보려 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면, 육체의 소멸이 의식의 소멸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인간은 제국이 쥐고 있던 가장 강력한 통제 수단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제국의 사형 선고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탄압은 질문을 낳았고, 질문은 더 많은 사람을 이 위험한 실험으로 끌어들였다.



봉인의 완성 — 제도화된 신앙

이 지점에서 전환이 필요해진다. 초기의 이 흐름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사이에는 명확한 단절이 존재한다. 바울 이전과 바울 이후는 사실상 다른 국면이다. 체험은 해석으로 바뀌고, 실험은 교리로 변하며, 각성은 관리 가능한 신앙으로 재배치된다. 일곱 교회는 영적 공동체이기 이전에 구조였다.

흩어질 수밖에 없던 질문들을 고정된 틀 안에 수용하기 위한 최초의 시스템. 그리고 이 시스템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에게 너무나 유용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인은 통제할 수 없지만, 죽음 이후를 약속받은 신자는 관리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구조는 제거되지 않았고, 오히려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한다. 갱신은 순종으로 바뀌고, 각성은 신앙으로 대체되며, 신과 인간의 직접 연결은 다시 한번 봉인된다. 이것은 배신이라기보다 시스템의 선택이었다.


예수는 계속 희생양으로 남아 있지만, 그의 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봉인되었지만, 삭제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불필요한 질문을 멈추지 못한다. 왜 존재하는가. 왜 의식이 필요한가. 왜 신은 침묵하는가. 그 질문들은 세상을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닫히지 않게 한쪽 벽에 계속 금을 낸다.

어쩌면 매우 다행이다. 모두가 예수가 아니어서, 모두가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아서. 그래서 우주는 여전히 실험을 계속할 수 있고, 갱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위험한 개인의 체험으로 남아 있다. 나는 실험의 답을 구하기 위해 사유하지 않는다. 다만, 봉인된 관계를 다시 묻기 위해 여기까지 걸어왔고 또 계속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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