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닮은 사람

또 다른 "나"

by 무이무이

제이콥의 여정, 그리고 ‘우리’라는 이름의 존재


나는 『시: 창세기를 위한 시』라는 연재에서 제이콥의 여정(9화,10화,16화~23화)을 집요하게 따라왔다. 도피, 방황, 각성, 선택, 인내, 독립. 그리고 마침내 쌍둥이 형제 제이콥과 에이서스의 만남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지점에서 이야기를 더 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는 더 이상 서사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이콥과 에이서스는 각자의 길에서 20년 만에 만난다. 그러나 그들은 장자의 명분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하지 않았다. 원한을 풀기 위한 피의 복수도 없었고, 정의의 심판도 없었다. 그저 서로를 끌어안고, 서로를 확인한 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 장면이 말해주는 것은 명확하다. 이 이야기는 누가 이기고 지는 문제도 아니고,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도 아니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자격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의 문제도 아니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은 인간의 문명과 권력 구조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다.




제이콥과 에이서스의 만남은 한 인간의 완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한날한시에 한 배에서 태어난, 마치 한 사람과 같은 쌍둥이다. 하지만 그들은 탄생이라는 분기점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제이콥은 애초에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환경, 선택할 수 없는 다른 방향의 삶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자 집착이었다. 내가 저쪽 길로 갔다면 어땠을까. 내가 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지금과 달랐을까. 심지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장자의 명분이라는 것이 팥죽 한 그릇으로 내 것이 된 것인가. 어머니 레베카에게 등 떠밀려 에이서스의 축복을 대신 받았지만, 이것이 과연 정당한가.


그래서 제이콥은 도망친다. 에이서스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과, 유년기를 함께해온 그 환상으로부터. 그리고 도피와 방황의 한복판에서 그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사닥다리의 꿈을 꾼다.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기만 하는 사닥다리가 아니라, 빛의 존재들이 끊임없이 오르고 내려오는 순환의 장면이었다. 그 꿈에서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았다. "하늘"""은 각기 다른 존재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었다.

현재의 ""라는 존재는 하나의 선형이 아니라 여러 층위의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구조였다. 지금의 ""라는 존재, 아직 가능성이 열리지 않은 ""라는 존재, 아직 선택하지 않은 가능성. 이 모든 ‘나’들은 서로 단절되어 있지 않고 이미 연결되어 순환하고 있었다. 이 깨달음 이후 제이콥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제이콥에게 하란에서의 삶은 그 실험의 장이었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고 싶었으나 환경과 규약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분노하지 않았고 떠나지 않았으며, 불운을 저주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인정했고 인내했다. 사랑을 얻기 위해 7년을 견디고 또다시 7년을 견디며, 가족을 위해 다시 6년을 견딘다.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실험을 한다. 가치 없다고 여겨진 것들, 아무도 원하지 않던 것들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실험은 얼룩지고 검고 가치 없어 보이던 흠 있는 양들을 가치 있는 존재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룩한 지위와 재산을 소유로 고정하지 않고 다시 떠난다.


에이서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장자의 명분을 경시한 사람으로 오해되어 왔지만, 애초에 그것을 관념으로 붙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에게 장자의 명분은 소유해야 할 권리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현실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사냥하고 가족을 지켜야 하는 삶 자체가 그의 책임이었고, 그것은 ‘배고픔과 지침’으로 상징되었다. 그에게 장자의 명분이라는 환상은 팥죽 한 그릇보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이콥의 소행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쫓아가 보복하지 않았다. 그는 아이작의 저주를 간직한 채 붉은 땅, 이두메아의 황무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회피하거나 도피하지 않았고, 그 땅 위에 우뚝 섰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났을 때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살아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창세기의 가장 이상한 문장이 비로소 의미를 드러낸다. “우리가 우리를 닮은 사람을 만들자.” 신이라는 존재가 유일신이라면 왜 신은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을까. 그것은 신의 의식이 단일한 점이 아니라 여러 층위로 펼쳐진 구조라는 의미가 아닐까. 신이라는 뜻이, 전능자라는 뜻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가능성의 합이라면, 신은 자신을 지칭할 때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신을 닮았다는 인간 역시 그러한 존재일 것이다. 신이 ‘우리’라면 인간도 ‘우리’다.


나라는 존재는 지금의 선택 하나로 확정되는 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선택들이 대칭을 이루며 공존하는 장이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착각한다. 저 사람의 삶은 나보다 훨씬 낫다. 나는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다. 지금의 이 길은 애초에 잘못된 출발이 아니었을까. 나는 너무 혹독한 환경에 태어나 너무 억울하다고. 그래서 우리는 비교하고 분류한다. 신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고통 속에서 시작한 사람과 비교적 평온한 출발선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 비교의 끝에서 늘 같은 질문으로 돌아온다. 왜 나는 이렇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가.


그러나 이 비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좋고 나쁨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서로 다른 삶의 숙제일 뿐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난 삶에는 결핍 대신 다른 형태의 공허가 주어지고, 고통 속에서 시작한 삶에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이 주어진다. 신을 믿는 삶에는 의심을 견뎌야 할 시간이 있고, 신을 믿지 않는 삶에는 의미 없는 세계를 끝까지 통과해야 할 용기가 요구된다. 겉으로 보기에 더 나아 보이는 삶은 언제나 있다. 그러나 그 삶 역시 자기 자리에서만 겪을 수 있는 고유한 무게를 안고 있다.

비교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삶은 사실 나의 또 다른 가능성이다. 그 모든 가능성은 이미 내 안에 있다. 지금의 환경과 지금의 선택은 수많은 경로 중 내가 통과하고 있는 단 하나의 경로일 뿐이다. 어디선가 다른 선택을 견디고 있는 내가 있고, 다른 환경을 통과하고 있는 내가 있다. 그 ‘나’들은 실패한 내가 아니라 아직 통과하지 않은 가능성들이다.


나의 지금의 삶은 저주도, 실패도, 시련도 아닌 또다른 나의 상보된 거울이 된다. 인간의 완성이란 모든 가능성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서로 다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 데 있다. 제이콥과 에이서스는 서로 다른 "나"의 총합이다. 제이콥과 에이서스가 다시 싸우지 않았던 이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이미 각자의 삶을 통해 ‘우리’라는 구조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끝났지만 미완이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비로소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


_제이콥의 여정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조세프의 여정이 계속됩니다.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