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이성이라는 착각
우리를 닮은 사람 II ㅡ 집단이성이라는 착각
쇼츠에서 이 개미들의 영상을 보았을 때 나는 개미들의 행동에 감탄했다.
개미들이 좁은 구멍에 걸린 물체를 끄집어내기 위해 각도를 바꾸고, 힘을 조절하고, 마침내 ‘정답’을 찾아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감독관이 위에서 지휘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개미의 세계에는 회의가 없다. 전략도 없다. 리더도 없다.
있다면 오직 페로몬과 확률뿐이다.
각각의 개미는 그저 당긴다. 밀린다. 막히면 방향을 바꾼다. 실패하면 다른 개미가 겹쳐 붙는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저항이 적은 방향]이 생기고, 그 방향은 [페로몬에 의해 증폭]된다. [실패한 경로]는 사라지고, [성공한 경로]만 남는다.
혹자는 이 과정을 보고 ‘집단지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지성이 아니라 수렴이다.
해법은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결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실험이 흥미로운 이유는 개미가 똑똑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 단순한 존재들이 너무 많이 모였을 때, 확률이 대신 계산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목적도 윤리도 없다. 오직 물리와 확률, 그리고 증폭만 있다.
인간의 집단은 개미의 집단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개미보다 훨씬 복잡한 언어를 갖고, 훨씬 정교한 논리를 만들며, 훨씬 고상한 이름을 붙인다.
페로몬 대신 우리는 이념, 공포, 정의, 애국, 신념, 시장, 여론을 사용한다.
하지만 작동 방식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불안은 빠르게 확산되고, 분노는 반복되며 증폭되고, 무언의 동조 속에서 개인의 책임은 서서히 지워진다.
개인은 생각하지만, 집단은 생각하지 않는다.
집단은 오직 방향만을 가진다.
히틀러는 독일을 전쟁의 도가니로 밀어 넣은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집권하기 이전부터 독일 사회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패전의 굴욕, 경제 붕괴, 실업과 분노, 그리고 이를 제어하지 못한 민주주의의 공백. 나치당은 이러한 불안이 만들어낸 집단적 선택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대중의 감정을 창조한 인물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감정을 언변으로 조직하고 증폭한 사람이었다. 대살육의 책임은 히틀러 한 사람의 이름으로 남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준비된 수백만 명의 동의, 침묵, 참여가 함께 작동한 결과였다.
문화 대혁명은 마오쩌둥 개인의 광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미 중국 사회에는 혁명 이후의 피로, 권력 투쟁, 이념적 불안정이 누적되어 있었다. 홍위병은 명령받은 꼭두각시라기보다, 시대가 허락한 폭력의 주체였다.
마오는 집단의 에너지를 풀어놓았고, 군중은 그것을 스스로 증폭시켰다.
그러나 학살과 파괴의 책임은 ‘마오쩌둥’이라는 이름 하나로 정리되었다. 집단이 만든 폭력은 지도자의 얼굴을 빌려 기록되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야망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백 년에 가까운 내전을 거치며, 일본 사회는 이미 전쟁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구조가 되어 있었다.
전국 시대 이후 전쟁에 최적화된 무사 집단, 통일 이후 남아 있던 군사적 긴장, 외부 팽창을 통해 내부를 통제하려는 국가 구조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그 구조 위에 서 있었을 뿐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이름이 같은 자리에 섰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전쟁의 책임은 ‘히데요시의 광기’라는 서사로 압축되었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은 수양제 개인의 집착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운하 건설, 과중한 세금, 병력 동원의 반복 속에서 제국은 이미 전쟁을 멈출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제국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 폭력을 방출하지 않으면 어차피 붕괴되어야 할 운명이었다.
수양제는 패망의 최종 책임자로 기록되었지만, 전쟁은 이미 국가 시스템 전체가 선택한 방향이었다.
제국의 관성은 한 황제의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우리는 이 모든 현상을 ‘집단지성’이라 부르고 싶어 한다. 그래야 덜 무섭기 때문이다.
지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책임은 흐려지고 결과는 우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지성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가 작동하는 물리적 과정에 가깝다.
개미의 페로몬 증폭은 무정하다. 방향은 있지만 의도는 없다.
반면 인간의 증폭은 언어를 두르고, 도덕을 입히며, 정의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래서 더 설득력 있고, 더 조직적이며, 훨씬 위험하다.
개미는 구조를 만들고 끝나지만 인간은 구조를 만든 뒤, 그 결과의 책임을 분리한다.
개미는 페로몬의 농도가 짙어지는 쪽으로 움직이고, 인간 역시 불안, 분노, 신념, 이념 같은 보이지 않는 신호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집단의 흐름에 편입된다.
차이가 있다면 단 하나, 인간은 이 움직임이 자신의 지성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바로 그 믿음이 자기 세뇌를 가중한다.
개미의 집단은 목적이 달성되어 먹이가 확보되고 길이 완성되면 구조는 해체된다. 그들에게는 승리도 패망도 없다.
하지만 인간의 집단은 다르다. 한번 형성된 방향은 그 끝이 붕괴를 향하고 있어도 스스로 멈추지 못한다.
의심은 배신이 되고, 경고는 소음이 되며, 속도는 점점 가속된다.
집단은 대개 수많은 죽음 이후에야 자신이 패망의 방향으로 달려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때 집단은 책임을 감당하는 대신 지도자의 버튼 오작동으로 역사에 남긴다.
종교의 본질은 원래 집단에 있지 않았다.
신앙은 애초에 개인적인 깨달음이다.
각자가 질문하고, 의심하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해석하는 일.
그러나 인간집단은 기다리지 못했다.
미로 속에서 각자의 길을 탐색하기도 전에,
너무 이르게 출구를 하나로 정해버렸다.
개미들은 막히면 돌아선다.
실패하면 다른 경로를 시도한다.
그래서 결국 물건을 끄집어낸다.
인간의 집단은 다르다.
탐색이 시작되기도 전에 우두머리를 세우고,
하나의 원리, 하나의 규칙, 하나의 신념을 만든다.
그 순간, 수많은 가능성의 길은 스스로 차단된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이 문장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생각을 멈춰도 된다는 신호다.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며,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는 약속.
그래서 미로 안에는 길을 찾는 사람보다,
천국행 직통열차 탑승권을 사려는 줄이 더 길게 늘어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상태를 종교라고 부르고 신앙이라 부르며
집단지성이라 착각한다.
그 착각은 계속 반복된다.
창세기의 이 문장은 신을 유일한 의지로 말하지 않는다.
엘로힘은 단일한 주체가 아니라, 다중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창세기의 첫 단어 ‘태초에(a beginning)’라는 의미는 단 하나의 시작(The beginning)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 속에서 반복되다 끝내 현실로 수렴된 하나의 시작(a beginning)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선택되지 못한 수많은 태초들이 소거되고, 견디고 남은 경로 하나가 세계로 드러난다.
그렇게 계산되고, 실패하고, 수렴된 결과가 우주라면
그 우주는 미리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불확정성이 유지된 장이다.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고, 그중 하나의 경로만이 지금 여기에서 계속 선택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성을 닮아 만들어진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명령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라,
의심하고, 탐색하고, 선택하며 그 결과에 책임지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이 불확정성의 우주를 닮은 인간이 가져야 할 신앙은 과연 무엇인가.
따라가기 쉬운 하나의 방향인가, 아니면 끝까지 질문을 견디는 태도인가.
집단의 확신 속에 안착하는 믿음인가, 혹은 불안 속에서도 선택을 멈추지 않는 신앙인가.
어쩌면 신을 닮았다는 말의 의미는 정답을 소유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끝까지 사유하라는 요구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