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가 아인슈타인을 통해 깨어날 때

아인슈타인처럼 생각하기

by 무이무이

"우주가 이해된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무한하고 광대한 이 우주가 인간에게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는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의 뛰어난 수학적 직관과 사유는 시간과 공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고, 상대성 이론이라는 이름의 공식과 개념들을 이 세상에 남겼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 수식들과 이론들은, 어쩌면 그의 사유가 도달하고자 했던 목적지가 아니라 그 여정에서 자연스럽게 남겨진 흔적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평생 붙들고 헤맸던 질문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왜 이토록 무한하고, 광대하며, 복잡한 우주의 작동 방식과 근원의 힘이 인간의 두뇌로 이해 가능한 구조를 갖고 있는가. 왜 하필 인간의 사고는 우주를 읽어낼 수 있는 문법을 지니고 있는가. 상대성 이론,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식, 중력 렌즈와 같은 수많은 예측과 통찰은 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라기보다, 답을 향해 걸어가다 우연히 손에 쥐게 된 부산물에 가깝다. 우리는 그 결과만을 보고 그를 천재라 부르지만, 정작 그가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아인슈타인을 너무 얕게, 너무 편리하게 이해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통해 시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공간 또한 고정된 배경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흐르지 않고, 공간 역시 단순한 빈 상자 안에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서로 뒤엉켜 늘어나고 줄어드는 구조였다. 관측자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흐르고, 속도와 중력에 따라 길이와 리듬이 달라진다. 기존 상식은 그렇게 해체되었고, 그의 사유는 이후 현대 과학의 발전 속에서 반복적으로 검증되며 점점 더 단단한 근거를 얻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아인슈타인은 물론 비범한 두뇌를 가졌고, 그의 지능과 사고방식은 지금도 연구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는 초능력을 지닌 존재도,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신적 존재도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고민하고, 질문하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인 것’으로 사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였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접근 방식이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재단하기 위해 빛을 기준으로 삼았다. 빛의 속도를 절대적인 상수로 고정하는 순간,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절대적일 수 없었다. 이 선택은 단순히 수식을 정리하기 위한 편의가 아니었다. 우리가 시간을 엔트로피의 증가로 느끼든, 인간이 만든 숫자단위로 이해하든,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우주의 150억 년이라는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출발점이 ‘빛’이라는 점이다. 우주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드러낸 순간, 인간이 우주를 관측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조건, 그것이 바로 빛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우주의 시계로 삼았다. 어쩌면 그는 이렇게 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주는 무엇을 통해 인간에게 인식되는가, 그리고 인간은 무엇을 통해 우주를 인식하는가. 그 질문의 교차점에서 빛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의식이 맞닿는 경계면이 된다. 혼돈과 공허, 모든 것을 품고 있으나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았던 태초의 심연에서 약 38만 년이 지나 빛이 나타나고, 그 빛에 의해 우주는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이 끝까지 파고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 우주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 그리고 그 드러남을 인간이 인식하게 되는 그 최초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출발점


그렇다면 이제 다음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인슈타인은 왜 하필 ‘빛’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왜 빛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우주 이해와 우주의 시작 구조를 하나의 사유 안에 겹쳐 놓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의 실마리는 그의 수학적 재능 이전에, 그의 출신과 사유의 배경에 놓여 있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단지 혈통만 유대계가 아니라, 유대교적 사유를 하며 성장한 사람이었다. 유대식 교육은 질문을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질문하지 않는 신앙을 불신한다. 그는 토라를 알고 있었을 것이고, 최소한 창세기의 문장들을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유대교에서 시작해 기독교, 가톨릭, 이슬람으로 이어지는 모든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는 하나의 텍스트에서 출발한다. 그 텍스트의 첫 장면은 모두 같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그리고 곧이어 나온다. “빛이 있으라.” 창세기의 우주는 질서로 시작하지도, 인간으로 시작하지도 않는다. 빛으로 시작된다. 드러남으로, 인식 가능성으로 시작된다.

이 서사는 신화적 요소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가 ‘존재하기 시작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가 인식되기 시작한 이야기'다. 혼돈과 공허 속에서도 이미 모든 것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빛이 있기 전까지 우주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고, 구분되지 않았고, 이름 붙여질 수 없었다. 빛이 등장하는 순간, 우주는 처음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구획되고, 인식 가능한 세계가 된다. 이 구조를 아인슈타인이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이 텍스트를 문자 그대로 믿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 서사가 지닌 사유의 구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빛을 물리적 현상으로만 해석할 수 없다. 빛은 우주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인간이 우주를 인식할 수 있게 만드는 조건이다. 아인슈타인이 빛의 속도를 절대 상수로 고정했을 때, 그는 물리학의 기준점을 하나 세운 것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공통분모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우주는 빛을 통해 드러났고, 인간은 빛을 통해 우주를 인식한다. 시작과 인식이 같은 매개를 공유한다는 이 정합성은 우연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하다.

그리고 창세기는 인간을 마지막에 배치한다. 마치 우주가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한 존재처럼 배치된다.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형은 오래전부터 수많은 해석을 낳아왔다. 그러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인간이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관계적 존재, 이해와 사유를 전제한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만약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라면, 그것은 우주가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관점이 인간 안에 주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빛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귀결되는 이 흐름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빛은 우주를 드러내고, 인간은 우주를 사유한다. 아인슈타인이 느꼈던 경이로움은 바로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왜 우주는 수학적으로 이해 가능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왜 인간의 두뇌는 그 구조를 읽어낼 수 있는가. 빛에서 시작된 드러남이 인간의 의식에서 다시 한번 완성되는 이 과정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질 수 있는가. 그래서 그는 말했을 것이다.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그 말은 겸손이 아니라, 경외에 가까운 고백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아인슈타인을 단지 ‘위대한 과학자’로만 부르기에는 너무 좁은 틀 안에 가두어 왔던 것은 아닐까.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


아인슈타인은 생전에 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신을 믿는다.” 이 짧은 문장은 당시 대중과 언론에게 꽤나 불편한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을 해체하고, 우주를 수식으로 다룬 사람이 신을 믿는다니.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기 위해 평생 보이는 것의 법칙을 파헤쳐 온 과학자가, 결국 설명되지 않는 지점 앞에서 초월적 존재에게 고개를 숙였다는 식의 해석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오해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도 결국 인간이고, 인간은 끝내 신 앞에서 무력해진다고. 과학은 여기까지고, 그 너머는 신의 영역이라고.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인 오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신’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그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은 스피노자의 신을 믿는다고. 여기서부터 이미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노여워하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으며, 선택적으로 사랑하거나 벌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의 신은 명령하지 않는다. 심판하지도 않는다. 그 신은 곧 자연 그 자체이며, 우주를 관통하는 필연의 질서다. 다시 말해, 신은 법칙이고 구조이며, 세계가 세계로서 작동하게 만드는 근원이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신 개념에 끌렸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는 이미 상대성이론을 통해 ‘절대적 기준’을 해체한 사람이었다. 시간도, 공간도, 관측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보여준 그에게, 인간의 감정과 도덕을 투사한 인격신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에게 신이란, 인간을 감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를 가능하게 하는 구조였다. 우리가 숨 쉬고, 별이 타오르고, 중력이 작동하며, 빛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는 그 이유 자체가 곧 신이었다.

여기서 다시 창세기가 떠오른다. 창세기의 신 역시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감정적 존재로만 읽히지 않는다. 혼돈과 공허 위에 ‘영이 운행’하고, 말이 곧 질서가 되며, 빛이 드러나는 순간 세계가 구획된다. 이것은 분노하거나 질투하는 신의 이야기라기보다, 무질서에서 질서가 출현하는 구조에 대한 은유에 가깝다. 아인슈타인은 문자 그대로의 신앙을 가졌는지와는 무관하게, 이 텍스트가 품고 있는 사유의 깊이를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는 스피노자를 거쳐, 자연의 법칙이라는 형태로 그의 과학 안에 스며든다.

그래서 “나는 신을 믿는다”라는 그의 말은 항복 선언이 아니라, 방향 선언이다. 그는 종교의 언어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질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왜 우주는 이렇게 질서 정연한가. 왜 이 질서는 수학으로 표현 가능한가. 왜 인간은 그 수학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이 하나로 맞물리는 지점, 바로 그 지점에 아인슈타인의 신이 있다. 그것은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우주가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경외에 가깝다.

어쩌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며, 동시에 이해 가능성 그 자체라고. 우주가 자연의 법칙으로 드러나고, 인간이 그 법칙을 사유할 수 있다는 사실. 그 놀라운 일치 앞에서 느끼는 경이. 그 경이를 그는 ‘신’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신은 교회나 성전에 갇혀 있지 않았다. 별의 궤도 속에 있었고, 빛의 속도 안에 있었으며, 인간의 사유가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있었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부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양자역학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양자역학이 도달하려 했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이 차이를 놓치면, 우리는 또다시 아인슈타인을 오해하게 된다. 마치 그가 시대에 뒤처진 고집 센 노과학자였던 것처럼, 확률과 불확정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낡은 이성의 상징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정교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파동함수, 연산자, 확률 진폭. 그것들이 실험 결과와 놀랍도록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양자역학은 설명의 도구로서 탁월했고, 미시 세계를 기술하는 데 있어 그 어떤 이론보다 강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해석이었다.

양자역학이 수학적으로 완벽해지자 세상을 이렇게 결론지으려 했다.
우주는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다.
사건은 원인 없이 발생한다.
세계는 본질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듯 굴러간다.

아인슈타인이 불편해했던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에게 확률은 무지가 만들어낸 언어였다. 아직 보이지 않는 구조를 대신하는 임시적 표현일 뿐, 우주의 최종 언어일 수는 없었다. 그는 확률이 관측자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몰라도, 우주의 근원적 성격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은, 양자역학의 수학을 부정한 선언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태도 선언이었다.

이 생각은 위에서 살펴본 그의 사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라면,
그 이해가 순수한 우연 위에 세워졌다는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미시 세계에서는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핀은 위아래로 갈리고, 입자는 동시에 여러 상태에 존재하며, 결과는 확률로만 주어진다. 그러나 그 무수한 불확정성이 모여 만들어내는 거시 세계는 놀랍도록 안정적이다. 평균은 질서를 만들고, 엔트로피는 방향성을 낳는다. 무작위의 총합이 구조를 이루고, 혼돈은 패턴으로 응결된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물었다. 이 연결을 설명하는 더 깊은 구조는 없는가?
확률과 필연, 미시와 거시, 빛과 물질, 자연과 인간을 하나의 틀 안에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원리는 없는가?

그 질문이 바로 통일장 이론이다.

통일장 이론은 단순한 물리학 이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우주가 우주로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마지막 질문이었고, 동시에 인간이 왜 그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우주가 우연이라면 인간도 우연이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를 사유할 수 있다면, 그 사유 역시 우주의 일부다. 아인슈타인은 이 단절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평생 그 다리를 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는 끝내 완성하지 못했다.
아니, 완성되지 않도록 남겨두었는지도 모른다.

그 숙제는 지금도 우리 앞에 있다.
우주가 인간을 사유하고, 인간이 우주를 사유함으로써 서로를 드러낸다는 이 오래된 직감.
아인슈타인은 그 직감의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은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 아인슈타인 이야기는 다음화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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