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 속에 숨어 있던 축복
가끔은… 그냥 억울합니다.
왜 난 이 모양일까.
왜 난 그렇게 아팠고, 그렇게 힘들었고,
왜 저 사람은 가지는 걸 나에겐 아무도 주지 않았을까.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슬며시 올라오는 감정은 '서러움'이 아니라
‘억울함’일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스무 살이 반짝이던 시절,
나는 매일 버티느라, 아프느라, 사느라 지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하루를 버텨내고 있는 나.
가끔은 이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신이 있다면,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건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진짜 질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주는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돌고 있습니다.
사실,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는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균형 잡힌 대칭이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예요.
무(無)에서 유(有)가 탄생한 건
어딘가에서 깨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균형, 비대칭, 불완전함…
그게 바로 생명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억울함도 어쩌면,
삶이 시작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진동일 수 있어요.
집 한 채를 짓는 데
모두가 같은 자리에 설 수는 없습니다.
기왓장은 집의 가장 높은 곳에서
햇빛과 비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며 자리를 지킵니다.
겉보기엔 높고 당당하지만,
가장 먼저 무너질지도 모르는 곳이기도 하죠.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한 채,
늘 외롭게 맞서야 합니다.
하지만 벽돌들이 떠받쳐주지 않는다면,
기왓장은 결국,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주춧돌은 땅 깊이 묻혀
빛도 못 보고, 늘 눌려 지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집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죠.
하지만 벽과 지붕이 없다면,
주춧돌은 그냥 땅에 박힌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누구도 혼자서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리를 지키고 버티면서
서로를 만들어주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누구도 쉬운 자리에 선 건 아니에요.
다만, 그 자리가 나만의 것일 뿐입니다.
다른 조건, 다른 생각, 다른 상처가
우리를 ‘서로’로 만듭니다.
만약 모두가 똑같았다면—
사랑할 이유도, 이해할 필요도, 배울 것도 없었겠죠.
차이가 없으면, 움직일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는 건
다 서로 달라서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꾸 바라보게 되고,
때로는 다투고,
그러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결국은 사랑하게 됩니다.
억울함도, 그 시작점 중 하나였습니다.
가장 어두운 틈에서,
세상을 바꾼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움직이지 못했기에,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말이 아닌, 우주로 대화할 수 있었죠.
부처는 궁전이 지겨워졌기에,
바깥의 고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났기에,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불평등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오늘 우리가 숨 쉬는 이 자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나의 억울함.
나의 상처.
나의 결핍.
그것들이 사실은
나만이 가진 '자리'를 알려주는 사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누구도 나 대신 겪을 수 없었던 이 길,
그게 바로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누군가의 억울함이 위로받을 수도 있습니다.
불공평한 세상이 야속하죠.
하지만 그 차이 덕분에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연결되고,
때로는 일으켜 세워집니다.
모두 같았다면,
우린 여기에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불평등은
억울함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가 되기 위한 시작점이었습니다.
여전히 힘들고, 여전히 억울한 날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사랑하고,
때로는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는 내가 있다는 것.
그것이
이 불공평한 세상이 내게 준,
가장 따뜻한 축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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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억울한 마음을 품은 적이 있나요?
지금, 그 마음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당신만의 이야기를 나눠주세요.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비춰줄 때,
억울함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