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는 소멸을 통해 드러난다
기타 줄 하나를 떠올려봅시다. 양쪽이 단단히 고정된 그 줄은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내지 않습니다. 마치 그 자체로는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요. 그 줄에는 언제든 울릴 수 있는 긴장과 장력, 에너지의 잠재력이 가득 차 있다는 것을요.
누군가 손가락으로 툭—하고 줄을 튕기는 순간, 줄은 그 긴장을 풀어내며 떨기 시작합니다. 떨림은 곧 파동이 되어 양방향으로 흐릅니다. 줄을 따라 움직이는 이 파동은 그 끝에서 반사되어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렇게 되돌아온 파동은 원래의 파동과 만나 반파동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파동이 정확히 겹쳐지며 정지파(Standing Wave)를 만들어냅니다. 얼핏 보면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파동은 사실 끊임없이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며 존재의 진동을 품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소리는 정지파가 소멸하면서 우리에게 전한 존재의 언어입니다. 줄이 떨리고, 에너지가 공기 중에 전달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그 소리의 존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에너지의 방출이 아니라,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감내한 소멸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진동이 사라지면 줄은 다시 고요한 정지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 안엔 여전히 다음 소리를 낼 수 있는 긴장과 가능성, 다시 말해 생명의 씨앗이 조용히 잠들어 있습니다.
인간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긴장상태의 기타 줄에서 진동과 함께 태어납니다. 사랑이든, 고통이든, 깨달음이든, 어떤 사건이 우리를 떨리게 만듭니다.
그 순간부터 인생은 진동합니다.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며 파동이 생깁니다. 우리는 웃고 울고,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존재를 발산합니다. 그리고
인생의 파동은 자신과 공명하는 정지파를 만들어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내가 남긴 울림이 누군가의 가슴속에 메아리로 남아 있다는 것을요.
우리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 몸이 늙어간다는 것은 단지 쇠퇴가 아닙니다. 그것은 에너지의 소멸을 통해 내 존재의 울림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늙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빛은 전자와 양전자가 쌍소멸 할 때 나타나며,
소리는 정지파가 소멸할 때 들립니다.
그리고 인간은, 인생의 긴 여정을 소멸해 가며 자신을 세상에 새깁니다.
늙어간다는 건 세상에 내 파동을 남겼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탄생보다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내 삶의 진동을 다 울리고 난 후,
정지된 고요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고요한 순간, 또 다른 손가락이 새로운 기타 줄을 퉁길 것입니다.
삶은 파동입니다.
존재는 소멸로 완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