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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Sep 27. 2016

'연애의 목적'에 대한 몇 가지 인문학적 고찰

그래도 연애를 하겠다는 당신에게 필요한 일곱 번째, 노동


“인생은 짧다, 연애하라”


삶의 유한성을 상기시키며 준엄하게 연애를 명하는 이 문구는 2015년 3월 간통죄 폐지 이후 한국에 재상륙한 기혼자용 데이팅 사이트 ‘애슐리 메디슨’의 광고 카피다. 여기서 연애는 서로 헌신하는 윤리적 관계로서의 사랑(love)이라기보다는 혼외정사(affair)에 가깝지만 문구는 어쨌거나 강렬하며, 우리들의 시선을 끈다.


연애를 끌어오는 것은 우리 시대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 중의 하나다. 많은 광고들이 ‘너, 로맨틱, 성공적’의 문법을 따른다. “외로운 당신 이 상품을 통해 연애에 성공하라”(화장품, 의류, 성형, 연애지침서, 데이팅 사이트, 결혼업체 등), 혹은 “연애하는 당신 이 상품을 통해 관계에 로맨틱함을 더하라”(식음료, 여행, 보석, 이벤트 업체 등)는 것이다.


물밀어 들어오는 미디어의 권유 속에서 행복은 연애에 있다고 가정되며 연애를 못/안하는 사람은 하자가 있는 것으로 치부된다. 커플들은 안도·자만하며, 솔로들은 조바심 속에서 자신의 솔로됨을 고민·타개하기 바쁘다. 이러한 ‘연애지상주의’의 시대, 애슐리 메디슨은 이 세례 속으로 기혼자들까지 공공연히 끌어들임으로써 주목을 얻는 데 성공했다.


애슐리 메디슨(출처: 연합뉴스)




연애지상주의


그러나 연애지상주의를 미디어와 마케팅의 차원에서만 이야기하는 건 반쪽 자리 답안이다. 우리를 둘러싼 연애 권유의 메시지들은 물론 자본에 의해 생산되지만, 주체 내적인 욕망과도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가속화는 개인들의 연애에 대한 욕구를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경쟁으로 피로해진 주체들은 이 피로를 경감시켜 줄 친밀한 관계를 필요로 하는 탓이다. 가족과 연인은 경쟁 체제 속 ‘친밀성의 섬’으로 기능한다.

이 욕구가 최근의 것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근대인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근대 이전의 세계는 정박되어 있었다. 타고난 신분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직업 역시 신분과 가족력, 속한 공동체에 의해 정해져 운신의 폭이 좁았다. 누구의 몇째 자식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 사람들의 정체성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반면 근대는 가능성의 세계다. 원론적이긴 하나 정해진 것은 없으며, 개인은 스스로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간다고 가정된다. 근대인은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거꾸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야만 한다. 자신의 흥미와 적성, 재능을 잘 파악하여 주어진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시키는 것, 곧 자아실현이 근대인의 과제인 것이다. 우리는 특정한 직업, 배움, 취미를 갖고자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성있는 나’가 되고자 한다.


이 고유한 자아를 향한 열망이 근대에 있어 연애를 특권적으로 만든다. 실상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우리의 고유함은 너무 쉽게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후임을 뽑고 집주인은 새 세입자를 들인다. 많은 관계는 계약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나는 수많은 노동자 중의 하나이거나 소비자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계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가는 글로벌 자본주의의 시대, 사람들은 스펙을 쌓아 대체불가능한 인력이 되고자 하지만, 이는 사실은 대체가능한 우리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드러낸다.


이런 불안을 한순간에 일소하는 것이 연애다. 연애란 서로의 고유성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건이며, 연인이란 나의 고유성을 알아보는 유일무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들의 눈에는 타인들은 보이지 않는다. 연애는 상대의 대체가능성을 거부함으로써 나 역시 대체불가능한 존재로 거듭나는 일이다. 벡 게른샤임은 이러한 기제로 인해 근대에 이르러 연애는 일종의 신흥종교가 됐다고 말한다. 주체는 고유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며 자본과 미디어의 연애론을 자발적으로 수용, 전파하는 것이다.


출처: 조선일보

 



연애,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근대인의 욕망


그런데 연애가 승인한다는 그 고유성, 대체불가능성은 진실일까?


이별을 해본 사람은 안다. 서로의 고유함을 아무리 약속해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랑은 식고 관계는 지루해지며 누군가는 먼저 약속을 철회한다는 것을. 이별은 우두망찰하여 자신이 더 이상 고유하지 않음을, 어쩌면 처음부터 대체가능한 존재였음을 받아들이는 일이기에 고통스럽다. 여자의 사랑은 남자가 잘 나가지 못할 때, 남자의 사랑은 자신이 잘나갈 때 시험 받는다는 대중적 격언은 사랑 역시 나의 절대적 고유성을 승인하기는커녕 외부적인 요인들에 속절없이 휘둘릴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사랑을 “자원의 교환”이라 말한다. 우리는 순수하게 끌리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서로가 가진 자원들을 가늠하여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흔히 ‘매력자본’이라 불리는 이 자원은 성별화되어 있는데, 여자의 가장 큰 자원이 외모라면 남자는 경제력이다. 무엇이 사랑을 시험하는가에 대한 앞서의 지침은 성별화된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사랑의 실체를 포착하고 있다. 여자는 남자의 경제력에 대한 선호를 사랑으로 오인한다. 남자는 자신의 경제력 내에서 차선으로 여자를 선택하며, 경제력이 달라지면 그에 부합하는 더 예쁜 여자를 취하고자 한다.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 이 경우는 ‘남자는 직업, 여자는 (부모) 돈’이 기준이다.

요컨대, 사회에서 내가 수많은 노동자, 소비자 중의 하나였듯 사랑의 세계에서 나는 여성적/남성적 자원을 겨루는 연애시장의 허다한 상품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직업, 학력, 신체사이즈와 같은 외적 조건들을 적어내게 해 매칭을 시켜주는 데이팅 서비스들이 불쾌한 이유는 우리가 직감해오던 이 진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연애는 조건의 교환이며 더 이상 조건이 맞지 않을 때 연애도 끝이 난다. 




고유하기는커녕, 자원의 교환에 불과한 연애


그렇다면 우리가 연애를 통해 확인받고자 하는 고유성은 환상에 불과할까? 실질적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선택할 때 고유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첫눈에 반했다고 하지만 진정 첫눈에 알 수 있는 것은 외모와 분위기 뿐이다. 외모와 분위기는 순수한 취향의 영역인 것 같지만 철저히 계급을 반영하고 있다.


70년대 연애소설의 여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맑은 피부의 해사한 인상의 남성을 좋아하는데, 그녀들은 사실 노동하지 않아도 되고 가정 밖에 내쳐져 거친 세계에서 자랄 필요가 없었던 중간계급 이상의 남자를 원하는 것이다. ‘대화가 잘 되는 사람’을 찾는 이들은 대화를 통해 교육수준과 문화적 자질을 가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선택의 순간 우리가 발견했다고 믿는 상대와 나의 고유성은 대개 조건이고, 자기확신이며 환상이다.

하지만 고유성은 환상이 아니기도 하다.


고유성을 환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고유성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연애에 대해 ‘선택’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하면 내게 맞는 사람을 잘 선택할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그 사람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선택 당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연애지침서를 비롯한 세간의 연애담론들은 대부분 선택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선택 그 자체로 환원되는 연애는 결코 고유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대체가능하다. 선택에 작용하는 건 조건이기 때문이다.

출처: 얼루어 코리아

연애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고유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택 이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은 그 대상을 선택하는 일에서 시작되지만 그 사랑을 진정 사랑답게 하는 것은 선택 이후의 일들인 까닭이다. 진짜 고유성은 나/상대 속에 내재했기 때문에 서로를 선택하게 하는 최초의 요소가 아니라, 선택 이후 관계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만들어주는 사후적인 결과물이다. 연애가 조건의 산물임을 인정함에도 그것이 여전히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면 함께 구축해온 관계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한 고유성은 함께 만들어가는 관계의 역사


이렇게 연애와 고유성을 이해하는 것은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우리는 우선 대상을 선택하게 한 배후에 대해 성찰적이어야 한다. 그 사람의 경제력이 끝날 때, 외모가 시들 때 끝날 사랑인지, 잘 맞다는 말로 내가 교환한 자원을 가리지는 않았는지, 더 나은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내 사랑의 조건에 대해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 선택을 진정 고유한 관계로 만들어가는 것은 나의 몫이다. 내게 남겨진 이 몫을 ‘관계노동’이라 명명할 수 있다. 관계는 최초의 스파크만으로 유지되지 않기에 유지를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요구된다. 한없이 가까운 듯해도 우리는 서로에게 끝끝내 타자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끊임없이 상대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려는 노력이 곧 관계의 노동이다. 선택에만 초점이 맞춰져 이제껏 이야기되지 않았던 이 노동에 대해, 관계노동의 윤리에 대해, 그리하여 지향할 윤리적인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사랑이 선택한 것을 지켜가는 것, 곧 관계노동하는 것일 때 윤리적인 태도는 더 많은 노동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내가 하지 않는 노동은 결국 상대가 하게 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여성들이 주로 이 노동을 감당해 왔다. 아버지들은 관계나 관계노동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며, 어머니들의 노동에 얹혀 관계를 유지했다. 상대의 몫을 줄여주지는 못할망정 사랑이란 이름으로 내 몫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이용하는 ‘갑질’은 사랑이 아니다.


노력했음에도 관계는 끝날 수 있다. 시절인연이란 말이 있듯 인연은 계절처럼 오고가며,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남겨질 수 있다. 그때 해야할 일은 뒤늦게 내 노동에 대한 대가를 찾고 원한으로 얼룩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간 후에 눈을 돌려야 할 곳은 끝난 관계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선사했던 고유한 순간들이다. 끝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두지 않는 것, 사랑의 순간들을 온전히 사랑으로 간직하는 것, 내가 선택한 사랑으로 감당하며 궁극적으로는 이 고통을 자원화해는 것, 그것이 이별에의 대처일 것이다. 




기꺼이 더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의 능력이다


대상을 선택할 때 사랑은 특별한 능력을 요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선택 이후다. 우리가 연애를 갈망하며 획득하기를 바라는 고유성은 가능성으로만 주어져 있다. 노동이 있는 관계만이 고유성을 획득할 수 있다. 노동하기를, 더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랑의 능력은 다름 아닌, 그곳에 있다.


※ 이 글은 해피브릿지 사내 인문학 강연을 위한 강의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이 비(非)연애의 시대, 
그래도 연애를 하겠다면
그런 당신에게 필요한 연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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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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