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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Feb 25. 2016

당신이 되어 본다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연애의 순간 그래도, 

“자기가 그럼 자기중심적이지, 남 중심적이야!”


드라마 『우리 결혼할 수 있을까』에 나오는 이미숙의 대사다. 엄마의 지나친 간섭으로 삐걱대는 결혼 준비 과정에 지친 딸의 질타(“엄마는 어떻게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해? 엄마는 너무 자기중심적이야”)에 이미숙은 오히려 역정을 내며 이렇게 답한 것이다. 우리가 힐난의 의미로 쓰는 ‘자기중심적’이란 말이, 사실은 특정한 사람들의 성격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이며, 이미 ‘자기중심적’이란  말속에 그러한 함의가 내포돼 있음을 지적한 명대사라 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 자기는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연애하는 인간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중요한 명제로, 다만 그 말이 향하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나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하는 상대로부터, 상대의 자기중심성을 비난하는 나에게로. 


기억하자, 자기는 자기중심적이다


사랑은 주는 것이 본질이며 연애는 수행의 과정이어야 한다고 글 써왔지만, 혹시 내가 중생들의 연애에 훈수 놓는 구도자의 위치에서 발화하지는 않았을까 조심스럽다. 진실을 말하자면, 본디 본질이란 가닿기 어렵고 수행은 고된 법이라 나 역시 내 연애에서 자주 내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지 못한다. 내 욕망을 한껏 투사하다 뜻 같지 않으면 되려 연인 탓을 하려 들기 부지기수다. 그리고 순간순간 튀어나오는 이런 유아적인 모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남자친구와 일박이일을 다퉜던 I도 그랬다. I는 4년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 준비 중이었다. 그들에게도 풍파기는 있었겠지만 2년 차에 들어서면서는 꽤 안정적으로 관계를 유지해왔고, 다투더라도 싸움을 한나절 이상 끌고 가지 않는 자신들만의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노하우 덕분인지, 뺄 것 다 빼고 하는 결혼이라 비교적 결정할 것이 많지 않아 그런지, 남들은 자주 싸운다는 결혼 준비 과정에서도 큰 고비가 없어 이대로 결혼하나 했다. ‘부엌’에서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둘은 아일랜드 식탁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요약하면 I는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고 남자는 없어도 된다는 입장이었다. 냉장고의 위치를 바꾸거나 테이블을 거실로 빼서라도 아일랜드 식탁을 관철시킬 안을 짜는 I에게 남자는 조목조목 그것이 구조와 동선상 무리인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I는 전향적으로 고민해보는 척도 해보지 않고 자꾸 안 된다고만 하는 남자가 야속했고 남자는 집 크기와 구조를 생각했을 때 실질적인 어려움을 재차 설명했음에도 한사코 듣지 않으려는 I가 이해되지 않았다.


태도를 문제 삼은 건 I였다. 고려조차 않는 너의 태도가 나로 하여금 더욱 강경한 태도를 취하게 한다는 거였다. 남자는 객관적 사실을 직시하라고 했다. 그걸 직시하면 지금처럼 우길 일도 없으리란 거였다. “그게 왜 객관적 사실이야? 그런 태도가 문제라고.” “태도 때문에 화났다고? 딱 봐도 안 되는 일을 고려해보는  척한다고 뭐가 달라져?” 분위기는 심각해져 태도와 뉘앙스와 팩트가 다퉈지는 법정으로 변했다. 이제껏 그들이 거쳐온 무수한 연애의 문제들에 비하면 아일랜드 식탁을 놓을지 말지는 정말인지 너무 사소해서, I와 남자는 물론 아일랜드 식탁으로서도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아일랜드 식탁이 뭐라고 결혼을 앞두고 저렇게 싸울까 싶지만, 사실 결혼을 앞둔 연인들이 싸우거나 헤어지는 계기는 대부분 저런 사소한 불일치와 언쟁이다. 양가 부모님까지 개입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어지는데, I의 아일랜드 필수론 역시 부엌에는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게 좋지 않겠냐는 엄마의 말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I는 평소 엄마 말을 잘 듣는 편이 아니었으나, 그날 따라 왠지 남자에게는 꼭 엄마의 말을 관철시키고 싶었다. 자신은 듣지 않은 부모님의 말을 상대에게는 듣게 하고 싶은 이 이상한 현상은 결혼 준비 과정 중에 유독 자주 일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비슷한 사연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차이의 존재들의, 일치에 대한 환상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둘이서 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사람이 둘이란 건 그 순간부터 ‘차이’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연애는 단순한 호오나 취향부터 자라온 환경, 신념, 가치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인식, 삶의 지향까지 무수한 차이로 빚어진 같을 수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맞춰가 보기로 하는 약속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름답게 들리지만, 인간이란 이런 차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존재인 게 문제다. 최초로 상대의 마음이 ‘나와 꼭 같음’을 알았을 때 연인들은 가장 행복하다. 우리가 연애에서 가장 고양되는 순간들은 이런 일치와 합일의 순간들이라, 실제로 만나 함께 있을 때보다 때로 멀리 떨어져 서로를 상상하고 있을 때 더 행복한 역설이 발생한다.


내 상상 속의 그는 내가 그에게 바라는 모습 그대로다. 그는 내가 소망한 바를 행한다. 그러나 애달픈 상상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만난 현실의 그는 결코 내 상상 속의 존재와 같지 않고 우리는 그 낙차에 우두망찰하게 된다. 일치와 합일은 순간적이거나 상상적이며, 우리는 차이의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연애의 상황이란 일치를 좋아하지만 사실은 차이의 존재인 두 사람이 끝나지 않는 협상의 테이블에  우겨넣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애뿐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의 상황도 이와 유사하지만, 우리가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협상은 별로 어려울 게 없다. 차이는 당연히 존재한다고 가정되고 일치는 기대되지 않기에 숱한 차이가 발견되어도 대수롭지 않다. 사이좋게 확인하고 이해한 뒤 때가 되어 흩어지면 된다. 우리는 각자를 유지하며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그처럼 쉽게 봉합할 수가 없다. 그가 내 기대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거나 발견된 차이를 들어 나를 비난하며 인정을 거두는 제스처라도 취하게 되면 우리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다. 온전한 이해와 조건 없는 수용과 인정을 약속하지 않았던가. 사랑을 설명하는 온갖 좋은 말들이 다 호출되어 나온다. 그러나 그런 사랑의 정의를 통해 내가 그에게 묻는 질문은 좀 다른 것이다. “당신은 왜 내 뜻과 같지 않(아 나를 이토록 서운하게 하)는가?”


이때 외쳐야 할 것이 이미숙의 대사다. 자기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기중심적이다. 자기는 자기중심적이라, 딴에는 그를 이해하고 딴에는 그를 위하여 했다는 일조차도 그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성찰하고 제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또 쓸 때야 겨우 자기 옆에 남을 살짝 들일 수 있을 뿐 그런다고 해도 남 중심적이 되는 일 따위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미 갈등의 상황에 들어서 언쟁을 벌이는 중에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미  불붙고 나면 이제는 자기중심적인 두 자기의 싸움이다.


I는 남자와의 전화를 끊고  이불속에 몸을 말아 넣고 한참을 식식거린 끝에 바로 앉아 다이어리에 쓰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부터 흥분하기 시작했는지, 내가 그에게 한 말은 다 옳았는지, 진짜 무엇이 자신을 화나게 했는지 찬찬히 써나갔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의 마음을 상상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꾸만 자신을 변호하려는 ‘자기’를 조용히 시키고서, 그의 서운함과 섭섭함을, 가능한 공정하게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곧 그에게 먼저 연락했고, 아일랜드 식탁이 정말 필요했던 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타인을 상상한다


상대와의 일치를 희망하며 그에게 내 뜻이 관철되기를, 적어도 충분히  이해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차이는 고통의 원천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서로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의 협상은 종종 수월하지 못하고 대화는 자주 평행선을 달리게 된다. 상대 역시 나에게 자기 뜻의 관철을, 온전한 이해를, 약속했던 조건 없는 인정과 사랑의 이행을 나만큼이나 바라고 있는 까닭이다.


이 평행선을 종식시킬 수 있는 건 자기에 대한 계속된 주장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상상이다. 상대가 나를 위해 이러저러하리라는 자기중심적인 상상이 아니라, 자꾸만 끌려오는 자기중심성의 굴레를 극복하려는 시도으로서의 상상이다. 워낙에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라 시도만으로 타인에 가닿기란 난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어야 하는 시도로서의 상상이다.


나는 인간이 자기중심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연애는 인간을 성장시키지만, 한편 연애 관계 속에서 인간은 영원히 사랑받고 이해받고 인정받기를 욕망하는 일을 거두지 못하는 유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연애를 하며 때때로 타인이 되어 본다. 타인을 상상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또 아주 가끔 진실로 가닿는다. 찰나에 불과한 순간들이지만, 그 순간이나마 자기의 경계를 넘어본다. 우리가 연애를 하며 좀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타인과 나를 포함한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 연애의 쌉싸래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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