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평화기념공원 방문기
야심차게 떠났던 첫 해외여행지는 일본이었다. 부산항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가장 저렴한 편도표를 구입했다. 그 배를 타고 하룻밤 자고 나니 일본에 도착했다. 출입국관리소 직원은 돌아가는 표를 요구했지만 볼 것 충분히 다 보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던 여행이라 돌아오는 표가 없었다. 돌아오는 표 대신 나의 여행 계획을 그에게 설명했고 그는 스티커를 붙여주며 입국허가를 해주었다. 아마 내 설명이 귀찮았던 같다.
후쿠오카에서 시간을 보내고 떠난 두 번째 도시는 히로시마였다. 세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관광지 미야지마도 궁금했지만 그보단 궁금한 것은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이었다. 세계 2차 대전을 끝낸 강력한 원자폭탄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 스스로를 평화도시라고 불리는 그곳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칠십 년도 더 된 전쟁과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리틀보이는 어떻게 남아있을까. 호기심을 이길 수 없어, 야간 버스를 타고 도착한 히로시마 터미널의 공용화장실에서 대충 세수와 양치만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은 잘 정비된 모습이었다. 곳곳에 잘 가꾸어진 꽃과 나무 덕분 산책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원폭 돔이었다. 원폭 돔은 당시에 물산 장려관으로 쓰이던 건물로 1945년 8월 6일 폭격을 당한 이후 골조를 드러낸 채 보존되고 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폭심지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로 히로시마의 상징이기도 하다. 잘 가꾸어진 장미꽃과 폭격 맞은 원폭 돔이 어울려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눈을 뜨고 찾은 곳은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있는 곳이었다. 1917년 이후 히로시마의 조선인 노동자 수는 급증하게 되는데 군사도시로 발전한 히로시마에서 다수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 내 실업 증가로 주춤했던 도일은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 의해 다시 적극 추진된다. 일본인의 참전으로 인해 일본 국내의 노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이유로 도일을 선택하게 되는데 농촌기반이 빈약했던 경북 합천 지역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생계를 위해 일본에 왔던 조선인들은 일본인이 받는 임금의 절반도 못 미치는 급여로 노동력을 제공했다.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는 히로시마의 미츠비시중공업과 조선소로 징용되어온 조선인 청년들도 있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인한 조선인 피해자 수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넓은 공원을 헤매다 위령비를 찾았다. 거북이 기단 위에 세워진 비석 앞에서 짧게 묵념했다. 더 오래 추모하고 싶은 마음에 비석 앞에 머무르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와서 꽃에 물도 새로 갈아주고 비석도 깨끗하게 닦기 시작했다. 혹시 유족인가 싶어 다가가 말을 걸었는데 일본어로 이야기하셔서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본인이면 어떻고 한국인이면 어떠랴. 정성스레 비석을 닦는 그의 손길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비석 앞에는 히로시마 조선 초급학교의 학생들이 남긴 액자도 있었다. 종이학으로 만든 한반도 그림 양 옆에는 ‘마음을 하나로 평화를 지키자’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원래 평화공원 외부에 있던 이 비석은 1999년이 되어서야 평화공원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시의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원폭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마저 차별을 겪어야 했다.
자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규모가 꽤 커서 자세히 둘러보기에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흘려버릴 수가 없었다. 꼼꼼히 읽고 또 읽었다. 자료관에는 원자폭탄이 떨어질 당시 히로시마의 참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폐허가 된 사진을 보며 원자폭탄의 위력을 가늠해보았다. 원폭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남긴 일기나, 죽어가는 가족들에게 쓴 편지를 읽을 때에는 눈물이 났다. 전쟁은 지독하게 슬픈 일이다. 전시실에는 나 말고도 다른 외국인들도 있었는데 모두 나와 같은 마음인지 침묵이 공간을 지배했다. 가슴이 먹먹해서 전시실을 나오고 나서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방명록에는 이곳에 방문했던 전 세계의 사람들이 히로시마의 원폭희생자를 추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슬픈 마음과는 별개로 이 참혹한 전쟁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는지는 알겠는데 그뿐이었다.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았던 조선인 희생자에 대한 내용은 몇 줄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상세하지 않았다. 자료실에서는 강제징용자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화를 염원하며, 평화도시를 자처하는 히로시마의 이 자료실에는 일본인의 슬픔만이 흩뿌려져 있다. 슬픔에 고개를 숙이다가 일본이 저지른 범죄를 잊을뻔했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 교묘했다. 승전국의 국민들에게도 패전국의 국민들에게도 전쟁은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책임마저 사라질 수는 없다. 애초에 일본의 제국주의 야심이 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곳곳에서 평화를 외치는 여기 히로시마에 평화를 파괴했던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왜 없는걸까.
다음 날 히로시마 평화 기념공원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추모관에 들렀다. 입구에는 한국어 설명도 있었는데 조선인과 중국인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징용과 관련해서는 ‘특히 반강제적으로 징용되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라는 문구가 전부였다. 자료실보다는 나았지만 이 문구만으로 당시의 조선인 강제징용자를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2,800여 명의 조선인 징용자들은 내가 이곳에 왔던 것처럼 부산과 후쿠오카를 거쳐 히로시마로 왔다. 대부분 1945년 전쟁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여전히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곳 추모관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희생자의 이름도 검색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가장 많았던 김씨로 검색하니 김옥자라는 7세 여자 어린이의 사진이 나왔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인 더러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원폭의 그림자와 함께.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폭탄이 생존자는 물론 그의 미래의 자식들도 끈질기게 쫓아다는 것을 그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에도 일본이 자국 내의 희생자를 돌볼 동안 조선인 피해를 외면한 탓에 그 사망률이 일본인보다 높다. 그 이후 치료와 배상에 대해서도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을 수 없었다. 70년이 지난 원폭으로 피폭된 사람들은 대를 이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협회를 결성하고 여러 번의 일본 방문과 소송을 통해 피해보상과 치료를 요구했지만 장벽은 높았다. 일본 정부는 여전히 1965년의 한일청구권협정을 들이밀며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 피해를 온전히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는 늙어버린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과 그들에게서 피폭된 채 태어난 자녀들이다.
히로시마가 진정한 평화의 도시가 되고 싶다면 그들이 외면했던 이 모든 기록들과 역사적 과오를 명시하는 것이 옳다. 평화를 원한다면 희생자 중 어느 누구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취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평화란 무엇인가. 역사는 더 많이 가진 자와 더 힘이 센 자가 협력해서 좌지우지하기에 싸우지 않으면 제대로 쓰이지 않는다. 평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전쟁도 무기도 아니다.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애쓰고 잘못된 것에 대해 끝까지 묻는 것이 필요하다. 일본은 그토록 평화를 외치면서도 왜 여전히 미화하고 왜곡하며 거부하는 걸까.
다시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정부는 틈만 나면 평화헌법을 수정하고 군대를 창설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평화를 들먹이며 전쟁을 준비하는 꼴을 보자니 가만 두고 볼 수가 없다. 우리가 있는 한 그것은 불가하다. 사죄와 배상 먼저. 그게 평화다.
*참고자료 : <한국의 히로시마>, 이치바준코 지음,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