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반갑습니다.

북한 사람을 만나다.

by 다다

또 만나요, 라는 인사로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별을 말하곤 했다. 또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또 만나게 될 거라는 희망이 담긴 인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흔한 작별인사조차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다. 다시는, 정말로 다시는 못 만날 것 같아서. 지금의 이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아서.

알게 모르게 내 주변에도 북한에서 온 새터민들이 자리 잡아 살고 있겠지만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북한 사람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책도 읽고, 다큐와 영화도 봤지만 ‘북한 사람’은 여전히 먼 존재였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채 200km도 되지 않는 지척인데 체감상의 거리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멀다.


대학교 새내기 때 남북대학생 상봉모임이라는 행사가 금강산에서 열렸다. 성공적으로 치러진 1차 상봉모임에 이어 2차 상봉모임이 진행되었고 나 역시 우연한 기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버스를 타고 금강산 관광지구로 달렸다. 학교와 민가들이 보였고, 북한 사람들도 보였다. 제일 많이 보였던 건 현대의 포클레인과 중장비였다. 도착한 첫날, 우리는 온정각에서 장전항까지 행진했다. 북측 사람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행진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화답해주었다. 구간마다 군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북측 사람들이 일하러 가거나 일상적으로 오가는 길을 나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했다. 자전거에 아이를 태우고 어딘가를 가던 아저씨, 밭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 방금 우리 옆을 지나간 트럭, 총을 들고 우리를 감시하던 군인들마저 매우 가까이 있어서 혼란스러웠다. 약간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왔을 뿐인데 수백 겹을 넘어온 것 같은 착각은, 그동안 남과 북이 쌓아온 시간 때문이겠지. 물리적 거리를 좁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만남. 지금껏 그걸 못해왔던 것이다.

내가 만난 북측의 대학생들은 김일성 종합대학과 김형직 사범대학의 학생들이었다.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색함이 감돌았는데 대화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하니 분위기가 달라졌다. 궁금한 것들을 서로 물었다. 서로의 일상과 대학생활에 대한 대화들이 오갔다. 조금 흥분한 남측 대학생과 달리 북측의 대학생들은 차분했고 예의 있었다. 내 고향 제주도에서 가져온 한라산 소주를 꺼내자 북측 학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함께 나눠마시며 제주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눴다. 그들은 제주 4.3을 나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에는 함께 금강산 관광도 했다. 지난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겨우 걷는 나를, 그들을 살뜰히 챙겨주었다.


<등대>라는 잡지의 기자 아저씨는 나에게 엽서 한 장을 써주었다. 함경도가 고향이라던 기자님은 함흥냉면이 정말 맛있냐고 묻던 나에게 아주 맛이 좋다고, 통일되면 한 그릇 대접할테니 꼭 자기를 찾아오라고 말했다. 엽서에는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나자는 내용의 상투적인 메시지가 쓰여있었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짧은 금강산에서의 상봉모임은 2박 3일로 끝났다. 만남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일까. 이별을 모두가 슬퍼했다.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들이 남과 북 여기저기에서 보였다. 꼭 다시 만나자고 말했지만 나는 확신할 수 없었다.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로부터 수년 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횡단열차에서 다시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 처음 타보는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모습이 궁금해 내가 탄 2등칸에서 출발해 열차의 맨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한 객차의 거의 끝에 다다랐을 무렵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한 무리가 길을 막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뒤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들의 일행 중 한 명이 우리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비켜주라고 말하는 그의 말투는 영락없는 북한 사람이었다. 어디서 왔냐고 묻는 나의 말에 평양에서 왔다, 라는 그들의 대답이 갑작스러웠다.


살이 쪄 비대한 어떤 이는 금으로 된 체인 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카드게임도, 보드카도 내가 생각하던 북한과는 접점이 없었다. 감시하는 사람은 없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열명이 넘는 북한 아저씨들이 노동하러 러시아에 왔다고 말했다. 목소리엔 힘이 있었고 ‘아랫동네’에서 온 나를 특별히 경계하지도 않았다. 나의 편견에 머리가 띵했다. 남들보다 조금 더 그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의 상상력 역시 분단의 경계를 넘지 못하고 남한 사람들이 으레 상상하듯, 억압받고 고립된 북한 사람들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나지 않았다면, 나 역시 남한에서 생산된 같은 이미지로 북한 사람들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제주도가 고향이라고 하니 눈을 반짝이며 이것저것 물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다. 사진으로만 제주도를 봤는데 언젠가 한 번은 꼭 와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라산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이야기해주었다. 평양냉면과 남과 북의 초등학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묘했다. 나는 그 기차 안에서 만난 독일인과 러시아인들에게 나의 명함을 나누어주며 또 만나자고 인사했는데 그들에게는 나의 명함을 건넬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조금 더 오래 대화를 나눴다면, 또 다른 북한 사람들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열차를 며칠 더 타고 시베리아의 도시 노보시비리스크에서 내렸다. 무거운 배낭을 메고 플랫폼에서 역으로 가는 와중에 다시 그들을 만났다. 나보다 더 먼 길을 여행하는 그들은 짧은 정차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나와 일행이 지나가자 나의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잘 가라”

“조심해서 가라”


기약없음과 기약있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그 이별의 말이 문득 슬펐다. 어떤 대답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안녕히 가세요, 짧게 인사하고 그 이별 인사를 오래오래 마음에 담았다. 그 후로도 나는 여행을 하면서 북쪽 사람들을 몇 번 더 만났다. 호기심으로 해외에 있는 북한 식당인 평양관에서 냉면을 먹어본 적도 있다. 용기가 없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기도 했고 낯선 도시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눈치를 나누기도 했다.


여행의 짜릿한 순간은 경계를 넘을 때이다.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만났을 때 나의 머리에 와지직 균열이 생기면서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여행은 모든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혀있는 남북 사이는 아직 예외처럼 보인다. 여전히 경계 넘는 것이 두려운 한국사회의 사회적•정치적 상상력이 한계를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남과 북의 장벽이 조금 더 유연해진다면 우리의 상상력도 휴전선을 넘어 우주까지 닿을 수 있을 텐데. 편견으로 가려졌던 우리의 눈이 밝아진다면 우리도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겠지.


만남, 그게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낯선 도시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또 기다려본다. 언젠가 이 만남이 내가 발 딛고 있는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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