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를 노동의 영역으로!
새벽 3시가 넘은 야심한 시간, 중고나라에 ‘그분’이 떴다. 직거래 장소는 의정부. 내가 살고 있는 서대문에서 왕복 두 시간이 넘는 거리라 망설이던 찰나 역시 잠들지 못하고 있던 남편 왈,
무조건 간다고 해. 무조건.
혹시나 다른 거래자에게 물건을 뺏길까 봐 서둘러 연락했다. 날이 밝은 뒤 남편은 혼자서 의정부에 다녀왔고 마침내 ‘그분’을 모셔왔다.
쌍둥이가 동시에 울어버릴 때는 정말 난감하다. 나의 두 팔로는 한 아이만 안아서 달랠 수 있는데 동시에 울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쪽쪽이를 대령하고 번갈아가며 안아줘도 무소용. 오히려 잠깐 안았다 내려주길 반복하는 탓에 우는 시간은 길어지고 내 팔은 아프고. 내 몸에 팔 두 개를 더 붙일 수는 없으니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쌍둥이 부모들이 극찬하는 크래들 스윙을 들여봤다.
크래들 스윙은 요람에 아기를 눕혀놓고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좌우로 움직이는 기계다. 등 센서가 있는 아기도 그냥 재워버리는 능력을 갖고 있어서 별명이 이모님이다. 사람보다 아기를 더 잘 본다는 그네 기계. 아니나 다를까 우리 쌍둥이도 크래들 품을 좋아했다. 잠들지 못해 칭얼거릴 때도, 울며 보챌 때도 크래들 스윙에 눕혀놓고 버튼만 누르면 혼자 놀다가 스르륵 잠들었다. 가히 혁명적이라 차마 한대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매일 중고나라를 기웃거리다 마침내 한 대 더 들여놓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앉아서 식사를 하고 책도 읽을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한 사람 몫을 톡톡히 해내는 대견한 기계라니. 왜 이모님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갔다. 크래들 스윙이 들어온 첫날, 이모님을 부르며 쌍둥이를 부탁했다.
크래들 이모님, 하늘이 하나 잘 좀 부탁할게요.
호칭에 의문이 생긴 것은 다음 날이었다. 기계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육아 전문가를 왜 이모님이라고 부를까. 육아의 짐을 여성의 몫으로만 돌려놓는 것 같아 불편해졌다. 크래들 스윙 덕분에 얻은 식사시간에 남편과 마주 앉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고 우리는 크래들 스윙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쌍둥이가 울며 보챌 때, 달래다가 영 안되면 크래들 스윙으로 달려갔다.
안되겠다. 너 선생님한테 가야겠다.
아이를 돌보는 사람을 자연스레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육아 노동의 강도는 상상하는 것보다 더 고되다. 하루 24시간의 대부분을 아기에게 쏟아야 하는데 예측불가에 변수도 많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시간을 쓸 수 없다.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해서 틈이 날 때마다 책과 유튜브로 공부해야 했다. 다만 아이를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필요한 가정 내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육아를 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런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 없다니. 우리 사회가 육아와 육아 전문직에 대해 무지해도 너무 무지한 것 아닌가.
출산 후 정부지원 산후관리 서비스를 이용할 때도 같은 고민을 했다. 산후관리 서비스 이용 전 날에도 남편과 호칭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모님이라는 표현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르기로 합의 봤다.
산후도우미 선생님은 밤새 아기들한테 시달리느라 뻗어버린 남편과 시들시들 지쳐버린 나에게 ‘눈 좀 붙이세요.’ 말하고는 이런 일과를 보낸다.
- 밤새 밀린 젖병을 씻고 열탕 소독한다.
- 나의 아침밥을 준비한다.
- 내가 밥을 먹는 사이에 아기 상태를 살핀다. (매우 중요하며 세심해야 한다.)
- 어제 널어놓은 빨래를 차곡차곡 개키고 정리한다.
- 아기가 깨면 유축한 모유를 데워 먹이고 트림시킨 후 다시 재운다. (하루 3번 정도)
-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반찬을 만들고 나의 식사를 준비한다.
- 화장실 청소와 거실 청소를 한다.
- 나의 간식을 만든다.
- 오늘 나온 빨래를 돌리고 널어놓는다.
- 내가 저녁을 굶지 않도록 반찬과 국을 준비해놓는다.
- 아기 목욕을 시킨다.
- 간혹 내가 우울하지는 않은지 나의 감정을 살피며 대화해준다.
- 내가 모르는 육아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 삐그덕거리는 내 몸을 살피고 가끔 마사지를 해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뜨악했다. 노동 강도도 세고 살림과 돌봄을 망라한다. 다만 아이를 키웠던 경험이나 살림했던 경험에 기댄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교육을 이수하고 현장에 투입된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런 직업을 부르는 호칭이 ‘이모님’인 것은 너무하다. 남녀가 다른 상에서 밥을 먹고 육아가 전적으로 가족 구성원 중 여성의 몫으로만 여겨졌던 시기도 아니고 지금 2020년인데. 육아 경험치가 많은 여성 구성원과 사는 가족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전문적인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늪에서 허우적거리기이다. 이토록 중요한 일을 하는 여성들이 육아노동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육아노동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속도는 왜 이렇게 더디기만 할까.
몇 개월 육아를 하다 보니 종종 경제적 보상은 물론 사회적 인정도 없는 육아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다. 인정은커녕. 경력단절녀로 낙인찍힌 미래만 보일뿐. 어쩌면 육아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바로 부르는 것, 그것이 당연스럽게 여성의 일상으로 여겨졌던 육아를 노동의 영역으로 올리는 일이 아닐까.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로서의 엄마이자 여성이자 돌봄 노동자. 나는 그것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