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하되 완벽을 목표로 하지는 말 것
서비스기획자로서 가장 긴장되는 말하기는 스펙 리뷰다. 오랜 시간 고민해서 기획한 내용이 정말 최선인지, 실현 가능한지, 구멍은 없는지 등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부터 점검받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스펙 리뷰 전에 혹시 놓친 부분이 있을지 수십 번 확인하지만, 그렇다 한들 이 기획서가 디자인이나 개발적인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스펙 리뷰 시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엣지 케이스(edge case, 보통은 발생하지 않는 특수한 상황), 해당 스펙에 연관된 과거의 히스토리, 다른 개발 부서와 협의가 필요한 부분, 법무 또는 보안 이슈까지 이어질 수 있는 리스크 등, 기획서에 보충해야 할 내용이 잔뜩 쏟아진다. "아, 내가 왜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지?" 하는 자괴감이 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꼼꼼하다
: 빈틈이 없이 차분하고 조심스럽다
서비스기획자가 되기 전까지 나는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비스기획자로서 요구되는 꼼꼼함은 일정을 한번 더 확인하거나 문서를 한번 더 검토하여 실수 없도록 일처리를 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내가 처음 작성해본 기획서를 리드님께 보여드렸을 때, 리드님은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처리할지?" "저런 사용자에게는 어떻게 보여줄지?" 등 나의 생각이 닿지 않은 부분들을 짚어주셨다. 기획서를 쓸 때 내가 사용자라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상상하곤 하는데, 실제 사용자들은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다르게 행동하므로 다양한 상황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이후로 나의 기획서는 점점 더 꼼꼼해졌지만, 개발 단계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스펙이 기획서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처리할까요?"라는 질문은 피할 수 없었고, 그럴때면 마치 큰 실수를 한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다행인 것은, 기획을 해보면 해볼수록 어디까지 고려해야 할지 조금씩 감이 잡힌다는 것. 그리고 완벽한 기획서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서비스기획 업무 초반, 이전 팀원분께 내가 서비스기획을 하기엔 충분히 꼼꼼하지 못한 것 같다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 그 동료분의 대답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기획이 원래 그런 거 아녜요?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일!"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기획이란 원래 수정을 반복하며 완성해 가는 일이 아닌가. 100% 완벽한 기획은 없다고 생각하니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에 임할 수 있었다.
(기획에 있어서 꼼꼼함이 요구되는 영역도 회사에서 정의하는 서비스기획자의 역할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어떤 회사에서는 기획자가 UX적인 세세한 동작까지 모두 정의해 주기를 원하고, 어떤 회사에서는 기획자가 요구사항만 전달하면 프로덕트 디자이너가 바로 디자인을 하기도 한다.)
기획서를 쓰는 것 외에도 서비스기획자가 꼼꼼히 챙겨야 할 부분은 많다.
내가 진행하는 기획이 어디까지 영향을 줄지 파악해야 한다. 우리 서비스의 스펙이나 정책이 변경됨으로 인해 다른 유관 서비스에서도 대응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서비스에 대해서는 잘 모르다 보니, 영향 범위를 꼼꼼하게 챙기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서비스기획을 할 때 옆팀에서는 어떤 일을 하는지, 옆자리 동료는 요즘 어떤 기획을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좋은 이유다. 긴가민가 할 때는 다른 서비스 기획자에게 상황을 공유하며 혹시 담당 서비스에도 영향이 있을지 검토해 달라고 요청해 본다. 관련 없는 사람을 괜히 귀찮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공유를 덜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양해를 구하고 공유를 더 하는 편이 안전하다.
정보보안이나 법률적인 관점에서 리스크가 없을지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특히 사용자의 데이터를 활용하는 스펙이라면 개인정보 이슈가 발생할 수 있으며, 사용자의 동의를 받거나 서비스 이용약관을 수정해야 할 수도 있다. '설마 문제 있겠어' 하며 지나쳤다가는 릴리즈 후에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사전에 검토 절차를 거치는 것은 필수다. 꼭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더라도, 사용자를 대상으로 미리 변경사항에 대한 안내 및 공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 전담 CS 부서가 있다면 변경되는 스펙을 사전에 공유하여 CS가 들어오면 어떻게 대응할지 미리 논의해야 한다. 이처럼 여러 방면에서 리스크를 검토하는 것에도 꼼꼼함이 요구된다.
이 밖에도 기획자가 꼼꼼하게 챙겨야 할 일들은 많지만, 어떤 일에서든 일정 수준의 꼼꼼함이 요구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닐까. 서비스기획이든 다른 어떤 일이든 중요한 것은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해 꼼꼼하되, 완벽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 것 같다. 꼼꼼한 기획자를 지향하되, 완벽주의자가 되지는 말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