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입니다. 물의 요일에 침상 위를 떠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떠 있습니다. 생생하고 아득한 꿈에 갇혀 거미줄에 감긴 날벌레처럼 뒤척이다 깨어났습니다. ‘그레고르 잠자는 날벌레’ 같은 닉네임이 잠결에 머릿속을 둥둥 떠다닙니다. 뉜 자리를 중심으로 잔잔한 파동이 입니다. 이불의 구겨진 모양새가 퍽 수면의 물결을 닮아있습니다. 간밤부터 사랑니를 앓다가 기어코 몸살이 찾아온 모양입니다. 파도치는 이불속에 고인 꿈을 헤집어 봅니다. 몇 번이나 수장시켜 가라앉았다 휩쓸려 부활하기도 하는 어떤 것. 침상의 바다에서 잉태하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한 어떤 것. 먹고사는 ‘낮의 일’과 무관한 한밤의 허영입니다.
밤은 어둡고 진공에 가까워 누구나가 우주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잠자리에 고이 누워있어도 어딘가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지요. 19세기까지 과학과 철학의 분리는 명확치 않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철학적 질문들을 과학으로 증명하곤 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고대 수학자들(피타고라스, 유레카를 외친 아리스토텔레스, 기하학을 정립한 유클리드 등)이 철학자이기도 했던 것처럼.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구절 ‘to be or not to be.’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 명제는 사느냐 죽느냐보다는 직역의 느낌으로 있느냐 없느냐 즉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가깝겠지요. 이것을 서양철학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궤로 보자면 있느냐 없느냐(존재론), 알 수 있느냐 모르느냐 (인식론),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가치론)인 것입니다. 여기서 ‘있는 것’을 모든 것의 최소 구성요소인 원자라고 대입해 봅시다. 고전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을 나누는 기준점 양자역학(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상태)을 끼얹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과학과 철학이 융합될 수 있는 강력한 여지입니다. 굳이 양자역학을 들먹이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 가장 이해하고 싶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꽤 여러 번 시도하고 있으나 계속 실패한) 내 인생의 가장 부질없고 어려운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한 무수한 시도가 실패한 이유는 나의 무료한 노력이 그저 멍청한 자의 지식에 관한 질척임에 그친 것이기도 하겠지만 철학책을 펼친 듯한 그 특유의 모호함과 ‘불확정성’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양자역학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수성은 태양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만큼 지구에서는 목격하기가 힘든 별입니다. 해질녁이나 새벽에 겨우 지평선 부근에서 볼 수 있는 그 희미하고 미미한 존재감의 별이 때로는 가설과 이론을 증명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해내기도 합니다. 수성 궤도의 원일점 위치가 백 년에 574초 변한다는 사실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의 근거가 된 것입니다. 태양의 큰 질량이 수성과의 공간을 휘어버리고 그것이 시간을 바꾼 것입니다. 몰라서 끙끙거리던 것, 이해할 수는 없어서 상상만 했던 가설의 치트키를 아무도 관심 두지 않은 작은 별이 쥐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웃사이더의 아무도 모르는 매력을 혼자 알게 된 것 같은 뿌듯함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양자역학을 어느 순간 이해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것입니다. 물론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의 경지를 감히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잃고 얽히는 것. 흡수하고 방출하는 것. 관측하고 읽는 것.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상태에 대해 인과율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일반인의 한계를 누군가는 양자역학으로 쉽게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의 세계도 밝히고 증명하는 것이 과학인 것처럼 진리의 영역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철학으로 이 어려운 학문을 풀어주지 않을까 기대해 보는 것이지요. 태양계에서 가장 뜨거운 항성인 태양과 제일 가까이 있는 행성의 이름이 물의 별 수성이라는 모순은 문과적 인간이 가장 이과적인 것을 탐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의 창과 모든 것의 방패가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양자의 세계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