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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Mar 17. 2020

파편화된 도플갱어, 유기적 도플갱어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장편 데뷔작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은 폴란드와 프랑스에 사는 베로니크와 베로니카라는 두 인물을 통해 도플갱어의 현대적 우화를 들려준다. 


    나에게 있어서는 한 달 전 쯤에 본 <세가지 색:블루>에 이은 두번째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영화감상이다. 세가지색 블루에 대한 느낌은 전적으로 굉장히 졸리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영화를 보던중 몇번 졸아서 다시 돌려 보기도 했고… 그 외 색이라던지, 음향, 카메라 무빙, 오브제 그 모든 것들에 상징성을 집어 넣어 놓는 감독 같았다. 하지만 영화의 커다란 줄기 자체는 매우 단순하다. 세가지색 블루의 경우 ‘가족의 사고이후 음악에 고통스러워 하는 작곡가 이야기’ 정도로 요약될수 있고 이번 영화도 ‘도플갱어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 축약될수 있을 것같다. 키에슬로프스키가 영화를 작업하는 방식은 이처럼 영화의 흐름을 관장하는 어떤 우화적 이야기를 차용하여 거기에 상징성을 대입시키는 것 같다. 그래서 캐릭터들도 인물과 인물간의 관계를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다기 보다도 어떤 상징적 매개체로서만 드러나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쁘게 말하면 평면적이고 장치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는 것이고 좋게 말하면 동화적인 느낌을 준다. 감독은 기독교적 교리를 자신에 영화에 많이 차용한다던데, 그러한 점이 영화의 이와 같은 색을 입혀준것 같다.


    그렇다면 이영화는 무엇에 대한 우화인가? 라는 대답에 감독은 아마 정치,사회,국가 그리고 그안에 살아가는 개인 이라 말하지 않을까 싶다. 베로니크와 베로니카는 폴란드와 프랑스를 개인으로 축소시킨것으로 보여지며, 그 외 시위나 어떤 전체주의적 면모를 풍기는 동상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도 한다. 키에슬로프스키감독의 매력은 이처럼 전혀 가볍지 않은 정치적 주제를 가지고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내러티브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로니카는 폴란드에서 합창단에 속해 있는 학생이다. 극 초반에 남자친구를 사귀고 우연히 들어간 오디션장에서 교사에게 발탁되어 결국 콩쿠르에 참가하게 된다. 베로니카는 말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고. 어느날 그녀는 광장에서 시위가 한창인 와중에 베로니크와 마주친다. 그녀와 똑같이 생긴 베로니크를 보며 깜짝 놀라는데 베로니크는 정작그녀를 보지 못하고 사진만 찍어댄다. 폴란드의 베로니카는 전체적으로 남성의 폭력에 노출된 것 처럼 묘사가 된다. 심장질환의 약한 발현을 느끼고 길거리에 쓰러져 있을 때 다가온 남자는 그녀를 일으켜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를 보여주고 유유히 지나간다. 광장에서 달려가는 시위대는 그녀를 밀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콩쿠르 도중에 쓰러지고 카메라는 마치 그녀의 영혼의 시점을 보여주는 것 처럼 관객들의 머리위를 쓸며 지나간다.



    그 뒤로 베로니크의 삶이 그려진다. 베로니카가 이러한 여러 폭력과 고난에 노출되면서도 누군가와 있다는 희망에 자신의 삶의 끈을 붙잡았다면 베로니크는 남자친구와 함께하는 와중에도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며 힘들어 한다. 친구의 이혼을 위해 거짓위증을 서준다는 약속을 하고 그의 남편 알베르가 찾아오는 내용이 잠깐 나오고 영화의 중반부는 인형술사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 한다. 인형술사를 다루는 부분에서, 베로니카와 베로니크의 연결점과 서술이 많이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영화 후반부에서 그 두가지의 서사가 다시 접합점을 찾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화 중간에서 갑자기 스토리가 다른 것으로 변환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형극은 어떤 무용수가 춤을추다 사망하고 그것을 마리아가 보듬어주며 요정으로 부활한다는 내용이다. 어린애기들이 눈 앞에 인형극을 보고 있을때 베로니크만이 홀로 거울에 비친 인형술사를 바라보는데 이 연출이 굉장히 아름답다. 그 이후, 베로니카에게 알 수 없는 전화, 편지, 거울을 통한 빛의 신호가 오며 베로니크는 직감적으로 이를 인형술사라고 판단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그가 생 라자르 역 근처에 있는 카페에 머물고 있다는 걸 알고 거기에서 그와 직접적으로 조우한다. 그러나 인형술사가 자신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자,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인형술사가 앞에 있음에도 택시를 타고 도망친다. 그러나 집앞에는 인형술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부분은 남녀간의 심리 묘사에 집중한 로맨틱한 부분인데, 나 개인적으로 있어서는 상당히 유치해 보였다. 뭐랄까, 라붐같은 7-80년대 유럽 로맨스영화의 애틋한 로맨스가 살짝 비춰보였다. 원래 로맨스라는게 공감하는 이에게 깊이 다가오고 그렇지 못한 이에게 얕은 법이지만, 인물들 자체는 매우 담백하지만 연출에 기름기가 있는 느낌이었다. 실망감에 못 이겨 뛰쳐나가는 여자, 그걸 뒤쫒아 가는 남자. 다시 잡아보려 하지만 간발의 차로 차를 타고 떠나 버리는 여자.이런 종류의 애틋함이라고 해야하나… 그러나 그냥 디테일일 뿐이다. 베로니크는 자기가 찍은 사진에서 자신이 가진 상실감의 원인을 알고 운다. 그러면서 섹스를 한다.(이것도 굉장히 유럽스럽다…)


    후반부에 인형술사는 베로니크를 위한 두가지의 인형을 준비한다. 이 장면의 카메라와 음향이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베로니크가 직접 인형을 움직여보이는데 끼긱끼긱하는 괴이한 소리가 나고 바닥엔 쓰러진 나머지 인형이 있다. 남자는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줘 보이는데 한 아이가 난로에 손을 데어 나머지 아이가 난로를 피하게 된다는, 어쩌면 영화의 요약이 담겨있는 대사였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다.


    나는 폴란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다. 특히 초반부의 시위대장면은, 감독이 어떠한 특정 시위를 상정하고 연출은 한건가? 하는 의문을 계속 품게 만들었는데, 어느 평론을 찾아보아도 정확한 해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대체로 동유럽과 서유럽의 비교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모호한 해석을 더듬을수 밖에 없는데, 나의 해석은 어떤 국가관, 정치적 담론을 뛰어넘은 개개인의 공감과 연민으로서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길 바라는 것이 가장 주된 메세지 인것 처럼 보였다. 일례로 베로니크가 베로니카의 존재를 진정으로 자각하게 되는 순간은 시위대와 경찰들의 무수한 사진속에 홀로 서있는 베로니카인데, 우리는 이런 시위와 투쟁의 최전방의 서있는 사진들을 보았을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하나의 개인이 아니던가? 베트남의 틱광둑 스님의 사진이 그러했고, 유럽 난민 사태 당시 해안가에 쓰러져 있는 어린 시리아 아이의 사체의 사진이 그러 했듯이 사진이 자신의 도플갱어의 죽음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은 함의하는 바가 있어 보인다. 



    항상 정치적인 부딫침 사이에 희생되는 건 연약한 개개인이 아니던가? 베로니카역시 시위에 참가한 것도 아니고 어떤 의견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한명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할 뿐이었다. 그런 개인에 대한 어떤 연민이 베로니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고 아프게 하는 상실이기도 했다. 이렇듯 개인의 삶과 정치적담론이 맞닿는 부분이, 결국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메세지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어딘가에 동 떨어져있는, 우리와 닮은 존재가 상실되었을 때, 그것을 잊지 않으며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 말이다.

아버지는 영화 중간에 자랑하던 나무전기톱으로 나무를 토막을 잘라낸다. 베로니크는 아직 살아있는 나무를 쓰다듬으며 영화가 끝이난다. 한 나무가 해체되고 가공되는 순간에도 아직 땅에 뿌리를 박은 다른 나무가 있다. 그 가공 이전의 통합된 나무의 생명성을 주인공은 쓰다듬으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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