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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Jun 02. 2021

인트로덕션-프로타시스

사실 영화와 상관없는 잡담

인트로덕션

요즘은 뭔가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 귀에 대고 말을 하듯 소리가 들린다. 옛날부터 생각이 많긴 했지만 이렇게 소리가 날정도로 들리진 않았는데, 뭔가 말도 안 되는 상상력과, 자기변호, 자기혐오, 이런 것들이 뒤섞인 대화를 알 수 없는 누군가와 나누고 있다. 그중에 쓸모 있을만한 것은 종이에 대고 적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쓰레기 같은 것들. 그래서 이런 생각의 흐름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말 그대로 귀신에 홀린 듯이 점심시간마다 혼자 압구정 도산대로를 걸으면서 생각의 늪에 빠진다. 왜 살지? 에 대한 고민이 요즘은 가장 크다. 나에게 자식이 있고, 자식이 외로움에 쳐해 있다면 나는 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해주게 될까?라는 상상을 하면서 나름대로 정리한 말들은 한편으로는 내가 겪어왔던 경험에 대한 변호, 내가 겪지 못하고 놓쳤던 것들에 대한 회환과 환상의 총집합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가 어릴 때 정말 힘들 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기억을 또 다른 가상의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채우려는 시도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거 같다. “얘야 정말 중요한 걸 알려주겠다. 사람이 사는데 목표가 뭘까, 너도 알다시피 생존이겠지 하지만 생존의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낮과 밤이 서로 교차하면서 하루를 구성하듯이 우리의 살아있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 적 있니? 생존이란 결국은 삶인데 우린 왜 삶의 한가운데서 지치게 될까. 삶의 지침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는 공존과 연대라고 생각한다. 생존하기 위한 투쟁과 싸움 속에 지칠 때 우리는 공존을 꿈꾸고 공존의 전제가 당연해질 때 또다시 생존을 도모하게 되는 공회전이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한 편에는 뒤쳐짐에 대한 불안함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이해받지 못함에 대한 우울이 있다. 왜 이 두 가지의 공허가 한꺼번에 채워질 수는 없는 것인지, 그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로 뒤바꾸는 것 같다.”


이제는 느껴진다. 시간이라는 개념이란 참으로 모호하고도 난해하다. 사람들은 시간 뒤에 숨기도 하고 시간을 통해 공격하기도 한다. 시간이란 일종의 거대한 손가락질과 같아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도 시간으로부터의 조롱과 멸시를 견디지 못하고 천천히 사라져 간다. 그래서인지 점점 침 튀기는 연설과 싸움들에 무심해지고, 그것들이 얼마나 지속될지 에 대한 나름대로의 혼자 계산해보곤 한다. 그와 동시에 시간의 멸시 앞에서 꿈쩍 않는 것들이 어렸을 때는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점점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긴 힘들지만, 어떤 특정한 텍스트나 영화나 음악은 이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아는 것 같아 눈에 띄곤 한다. 그것은 감정에 대한 것도, 환상에 대한 것도, 그 무엇도 배제했을 때 남는 근본적인 세계의 보편적 구조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면서 나 또한 이야기하고 싶어 지지만,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어 답답하다. 


물론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고 그 원리를 세상의 작고 분할된 이야기들을 재는 도구로 사용하는 그런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이야기란 사실은 커다랗고 불변하는 모순(이 자체가 모순인 것 같지만)에 가깝고, 그렇기에 이해하기가 더 어려운 것 같다. 왜 나는 어리석고, 부족하고, 그런 짓들을 반복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 가? 에 관한 질문에는 그 갈망하는 대상의 공허함에 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 같다. 


이야기는 끝이 없이 늘어진다. 이제는 생각의 기승전결은 사라지고 의미 없는 나열만이 남는다. 걸으면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이 기억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다가, 한 문장 글을 쓸 때마다 떠올라서 결국 문장의 연상의 연속으로 글이 완성되고 나면, 내가 무엇을 쓴 지도 잘 모르겠다. 글의 구조를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노력을 계속하지만… 절대 제대로 완성되지는 않는다. 내가 쓰는 글들은 논리 구조로부터 벗어난 거짓 덩어리에 불과하고 잘 포장하면 시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감상에 빠지는 것을 혐오하는 지라, 오히려 잘못 계산된 복잡한 수식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도 예술이라는 것을 하고는 있지만, 나에게 미적 경험이 일어나는 지점은 언제나 현재보다는 조금 더 언저리 어딘가에 있어서, 후회, 미련, 회환 등등과 같이 따라온다. 나는 두 팔 벌리고 삶의 활력을 끝까지! 즐길 수 있는 작자는 아니고, 그냥 내가 거주하는 세계의 구성을 조금조금씩 조작할 뿐인데, ‘무언가’가 ‘아마도’ 일어날 수도 있는 환경을 만들어보려 하는 것뿐이다. 그게 뭔지도 모르겠고 확신도 없다. 솔직히 확신이 있다는 게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잡아먹기보단 스며들고 싶고, 이런 태도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어떤 것이 필요하다. 내가 관심 있는 지점은 충돌과 파괴, 변화의 지점이 아니라, 모두가 지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설의 에필로그와 같은 순간인데 그 순간에 모두 각자가 몰두하고 있던 대상으로 벗어나서 비로소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알아차리고 관심 가지며 잠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 되었으면 한다. 돌로 된 튼튼하고 아담한 성당을 짓듯 말이다.  이것은 현재로부터 도피인가, 아니면 시간의 손가락질에 대한 정면승부인가. 그것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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