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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욱 Mar 29. 2023

안 좋은 이야기 하나 좋은 이야기 하나


1. 안 좋은 이야기


나는 뭐든지 간에 깊게 빠져버리는 경향이 있다. 좋아하는 것이든, 싫어하는 것이든 그 대상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몰입하다가 결국엔 매몰되어 버린다. 그러면 점점 더 나 자신을 잃고 어둠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면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기가 무서워지고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내가 자유롭고 이성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이라는 하나의 ‘내핵'이 있고, 감성과 행위라는 순간순간의 외형이 있다는게 객관적 사실이다. 그러나 감정에 지배된 사고는 그 논리체계를 전복시킨다. 순간순간의 감성과 행위가 진정한 내가 되고 이성적인 주체는 그 순간순간이 모여서 합을 이뤄야 부가적으로 주어지는 보상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하지만 분리된 신체, 분리된 감각으로서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제각각 분리되어 존재하는 나는 결코 이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나 자신의 완전한 신체 혹은 인간성을 잃어버릴 때 찾아오는 무력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성이라는 태양이 뜨는 정오에는 빛의 근원이 단 한곳이라는 사실이 명확하다. 하지만 태양이 모습을 숨기는 한 밤 중에 어둠은 한 곳으로 부터 기인하지 않는다. 가장 깊은 굴에서도, 연못에서도, 작은 잎사귀 뒤에서도 사방팔방 산재해있다. 나의 고통은 조각과 파편화에서 온다.


인강 강사들이 자주 하는 소리가 있다. 스스로를 명확하게 통제하는 삶을 살으라고.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또 내 삶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삶과 시간이라는 강한 인력에 의한 태풍에 휩쓸리는 깃털과 같다. 내 주변의 관계도 잘 다스리지 못한다. 관계에서 힘을 지니지 못하고 휩쓸리고 버리거나 버려진다. 내가 표현하려는 의도와는 다른 표현이 나오고 무겁고 싶은 상황에 가벼워지고 가볍고 싶은 순간에 무거워진다. 


큰 문제는 나는 나의 행운과 능력조차 잘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에게는 분명 남들과 차별을 둘 수 있는 장점과 강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능력조차 내 스스로 컨트롤 할 수 없어서 나에게 주어진 기회들과 행운들을 내 손 안에 둘 수가 없다. 뭔가 좋은 일이 갑자기 왔다가 갑자기 떠나버린다. 지난 날을 되돌려보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은 도대체 어떻게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장들과 글귀들은 다소 오글거린다. 한때 부정적 감정이 외면화되어 표현되는 사회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를 기억하면 어두운 감정과 모습들을 표출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저항' ‘분노' ‘퇴폐’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그런것들이 많이 사라져간다. 이제는 그러기가 많이 어색하다. 완벽하지 않아 튀는 인간을 우리는 이제 공동체로서 감각하지 않는다. 세상은 예전만큼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데 그런 모습을 더 감추고 있다. 세상이 그런만큼 나 자신도 그렇다. 부패물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그런데 그런걸 해결할 거리가 없다.


2. 좋은 이야기


세계의 설계에 가장 큰 결함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명제는 단 한 번도 틀린적이 없다. 그냥 세상의 시스템 코딩(?)이 그렇게 되어있는 것 같다.


감정에 침잠되어 내 뱉어진 말로 자소서 한 페이지를 채울만큼 (1000자 이상)의 문단을 완성시켰다. 이제 감정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행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내가 실제로 행했던 역사, 앞으로 행할 실천, 두 가지의 행위


역사 - 어느정도 나는 의도적으로 나를 이런 상태에 밀어넣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명확한 계획없이 나를 자유로운 상태에 던져놓았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내 신체가 무작위적인 세계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었고 변이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고 불안을 느끼지 않을 단체에 소속되어 공감하지 않는 노동에 힘을 쏟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몇 가지의 가능성으로 현재의 불안을 지탱해나가면서 월급을 받았다. (현대인에게 안정적인 직업과 월급은 고통이다. 더 스미스가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에서 부른 가사처럼) 내가 가진 장점을 묵히고 단점이 드러나는 영역에서 자기를 학대하고 좁히고 가능성을 가두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 그 문제의식 자체에 잘못된 것은 없었다. 나는 나의 가능성과 길을 찾아야했다. 그리고 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에 도달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디로 도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내게 지도를 제공하는 그들. 성과주의와 능력주의는 명확한 정답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성과주의 사회에서 1등의 가도를 달리고 싶다는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상반된 사회가 나를 양쪽에서 잡아당기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왜 여기에서 자아실현이란 무언가 1등을 해서 엄청난 주목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안정성이라는 이름으로 버려짐에 익숙해지고 스스로 눈을 가리고 살아야 하는가. 중간에 낀 열등감있는 중간층에서는 왜 서로서로 비교하고 깎아내리면서 자존감을 채워가야할까. 왜 반짝거리는 웨딩홀에 사이 안좋은 친척을 초대해야 하는거며, 서로 미워하면서 아닌척 하고 아닌 척하는게 밈이 되서 희화화 된 채료 유통되며 그 미디어에 익숙해져야만 하는가. 혐오의 연쇄고리 안에 갇혀버리는 중간단계 사람들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는가? 


젊은 노동자는 믿음과 신념을 갖고 살 수 있을까. 외적인 성과의 달성 보다도, 내면의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빈 그릇을 채우거나, 혹은 빈 그릇 그 대로를 인정하는 그런 심상에 도달하거나 최소한 가까워 질 수 있을까. 물질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개인이 건강하려면 자신감이 있어야하고 자신감이 있으려면 물적 근거가 있어야한다. 물적 근거의 가치는 그가 자신을 남들과 얼마나 비교하느냐에 따라 유동적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감각들, 정신적 혼란스러움은 어느정도 물질에서 기인하는 걸까. 물질 그 자체의 속성에서 기인하는가? 혹은 물질과 정신사이에 링크에 문제가 있는가? 내면, 사회적 관계, 물질 세가지 항의 긴밀한 연결고리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나머지 항들에도 큰 문제를 준다. 내면은 너무 불안정하고 추상적이어서 컨트롤 하기 어려운 대상이라면 반대항에 위치한 물질은 너무 단단하고 튼튼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기지 않아서 고통스럽다. 지금 이 세상은 특히 이 물질이라는게 단단한 콘크리트다. 그 콘크리트를 깨부수지 못하면 관계가 깨지고 내면이 무너져내린다. 


세상을 잘 살아가는 꿀팁은 내면이라는 항을 아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면에 대한 둔감함 혹은 오해가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된다. 그런 사람들도 많다. 아예 타고난 단단함. 그런데 어찌되었건 나처럼 추상적인 내면을 온전히 인식하기 시작하면 그것과 세계관계에 합의점을 반드시 찾아야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계엔 도저히 균열이 나지 않고 내면엔 손쉽게 균열을 발생시키면서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나 같은 사람들이 아주 많을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은 단지 세상이 외면하고 있는 점들일 뿐이다. 왜? 그 이유도 똑같이 설명이 가능하다. 물질을 자본주의로, 관계를 능력주의로, 내면을 개인의 소외로 치환하면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알면서도 보듬어 줄 수 없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도 이제 점점 안하게 된다. 외면화하기에 재미없는 소재가 되어버렸으니까. 내가 최근에 옛날 락앨범들을 듣다가 너무 몰입해버렸나, 레오 까락스의 영화를 보다가 너무 빠져버렸나. 도대체 그 시대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또 하나의 이야기


시간은 정말 중요하다. 정말정말 중요하다. 시간을 낭비지 않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시간의 성질을 인식하는게 중요하다.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감정들을 내가 이렇게 풀어놓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들이 일시적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느낀 감정들을 관측학자 처럼 기록해 둘 필요가 있는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과학을 통해 현상으로서 정립하듯 감정에 대한 객관적 기록은 그것을 다루는 또 다른 능력을 형성해준다. 


시간은 중요하다. 왜냐면 그것은 논리의 항에서 항상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한 편으로 지속적으로 흐르면서 한 편으로 기억이라는 형태로 저장된다. 논리는 그것이 말의 형태이든 글의 형태이든 하나의 완성된 전체의 체계 안에서 정립된다는 점에서 시간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다시말해 완전한 논리는 시간을 설명하지 못한다. 나는 무질서 속에서 감정을 아무렇게나 늘어 놓음으로서 완벽한 시간이라는 논리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 


사람의 관계안에서 우리는 정연한 논리에서 벗어나 서로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그 시간성을 인식할 수 있다. 따라서 관계와 만남이란 무엇보다 지혜로운 행위다.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글은 조그만 부분으로서 말의 형태를 흉내낼 수 있다. 나의 쏟아내는 글들은 언제나 말에 대한 흉내다. 글 감과 형태가 별로인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남들보다 진실하거나 솔직해서가 아니라, 나는 글을 통해서 세계(존재자)에 적용되는 논리 체계를 내면에 적용하려고 하며 그 불완전한 기술로서 상징을 사용하고 어떻게 보면 그런 방식 자체가 인간 내면을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면 나 역시 중요한 시간 한 가운데를 살고 있다. 사실 내가 늦게 깨달은 건지 아니면 다들 이제 깨닫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물질의 세계로 이행해가고 있다. 어렸을때 조지오웰, 시태오 읽고 락앤롤 음악 들으면서 이미지로서 겪었던 세계에 정말 발을 들이고 있다. 어른이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조금 더 총체적인 세계를 인식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자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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