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슬인데 토요슬
‘‘다 먹고살자는 하는 일인데’ ‘그래서 어디 먹고살겠냐’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지’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으면서 자랐다. 유년시절에는 IMF를 겪었고, 청소년기에는 ‘청년 실업 백만 시대에~’로 시작되는 유행어를 들었다. 새해가 되면 다들 ‘부자 되세요’라며 덕담을 건넸는데 그것이 우리 인생에 내릴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축복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곤란한 것은 학교에서 희망 직업과 그 이유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이 고생을 보상받을 정도로 연봉이 꽤 높은 직업이라서’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대신 그것과 최대한 먼 말들을 지어냈고 그것을 트럭 타프처럼 나의 속물근성 위로 덮었다.
수능이라는 승천 길에서 미끄러지자 그 모든 말들은 내게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전보다 더 게을러졌고 시니컬해져 이전에 믿고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특히나 먹고사니즘에는 알레르기 반응이 심했는데 타인이 나의 먹고 삶을 걱정하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그런 이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속해서 정신승리를 하며 살았다. 그러나 먹고사니즘은 이미 한 구석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즐거움들의 순간에는 몇 방울의 죄책감과 미안함이 스며있었다.(부모의 먹고사니즘으로 키워진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그 농도는 짙어져 자주 스스로를 혐오했다.
통장잔고가 만원 미만인 달들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신기하게 알레르기가 나았다. 그 시절 밤마다 눈물로 훈련했던 정신승리 덕분일지 나는 너무나 허무하게 먹고사니즘의 세계로 돌아왔다. 알레르기의 부작용으로 눈이 높아져 이왕 먹고살 것,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졌다. 재화와 서비스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따지게 되었고 건물주가 되고 싶고, 로또에 당첨되고 싶어 졌다. 월말마다 누구에게 돈을 빌릴지 고민하던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직업의 강도에 비해 월급이 적다고 분개하지만 월급으로 카드값을 내고 나면 이 정도로 사는 것도 감지덕지다 싶을 때가 있다.
먹고사니즘으로 돌아온 나는 웃기게도 제일 먼저 ‘먹는 것’부터 놓았다. 삼각김밥, 편의점 도시락, 라면, 고깃집, 피자, 술, 지독하게 쓴 커피 등. 허기는 지고 정성스럽게 먹기는 귀찮고. 대신 친구들을 만나 근사하고 고칼로리의 음식을 먹는 것으로 일상의 끼니를 외면했다. 그러다 어느 날 윤이 비건이 돼보려 한다고 했다. 공장식 축산의 비윤리성에 깊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그건 왠지 나와는 아주 먼 곳에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미자의 친구인 돼지 하마를 먹는 게 아니라 편의점에서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사 먹는 사람이었으니까.
구례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나와 윤은 모종의 결심을 하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식식거리는 삶에 대해 쓰는 지난 몇 주동안 ‘일주일에 하루는 비건 식생활’이라는 야심 찬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나는 얄팍한 양심에 심한 건망증, 귀차니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리와, 소울푸드와, 혼술에 대해 쓰면서는 이상하게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 졌다. 그래서 결이 다른 윤의 글들을 읽으며 자주 부끄러웠다. 나의 NEW먹고사니즘은 이전과 달랐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덜 착취하고 덜 유해해서 덜 자신을 혐오할 수 있길. 실패하겠지만 다음 달에도 도전한다. ‘일주일에 한 번 비건 식생활’ 두 번째 시도에는 윤이 추천해준 책과 영화와 다큐가 있다 부디 나와 비거니즘이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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