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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리 May 18. 2021

우리가 사랑했던 환상 -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


* 이 글은 아트인사이트의 문화초대로 기고한 글입니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944







혼자 영화나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극장을 걸어나오며 같이 얘기할 사람의 존재를 절실하게 느낀다. 이 캐릭터는 왜 그랬을지, 결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입이 간질거린다. 좋은 걸 보고 얘기하고 싶은 건 인간의 본성인 걸까 하면서 다음 번에는 친구를 데려와 다시 보기로 다짐한다.


무언가를 좋아해본 수많은 경험들은 좋아함은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더 커진다는 것을 알게 했다. 좋아함에 사람과 시간을 더할수록 애정의 크기는 무럭무럭 자란다. 생각보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밤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그리 흔하지 않더라. 어렸을 때의 나는 그런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길 기도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좋은 취향의 친구를 많이 만났지만 말이다.


바쁜 4월을 보내고 오랜만에 전시를 보러 갔던 날, 산뜻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며 이 전시가 누군가에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친구처럼 느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그의 그림을 보고 좋아함을 나누고 싶지 않을까.


 







삐죽삐죽 커다란 빌딩숲 사이 어느 지하에 숨겨진 미술관.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세심하게 채워진 이곳에서 ≪맥스 달튼, 영화의 순간들≫(2021.04.16-07.11)이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처럼 맥스 달튼은 주로 영화를 모티프로 삼아 그만의 방식으로 영화 속 세계를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이미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의 오밀조밀한 캐릭터들이 관람객을 반기는데 그 속에서 우리는 곧 익숙한 핑크빛 건물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모습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웨스 앤더슨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색감과 작품성으로 많은 매니아 층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예술 영화임에도 한국에서 꽤 대중적인 히트를 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이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자 주인공들이 일하는 장소인 호텔은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각인되어 있을 만큼 매력적인 디자인으로 사랑 받았다.


로비를 꾸미고 있는 이미지는 맥스 달튼이 그린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일러스트다. 그는 웨스 앤더스 감독 영화의 많은 일러스트를 작업하고 있고, 한국에서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컬렉션 북의 작업으로 많이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로비와 팜플렛, 그리고 전시의 메인 섹션에서 호텔 일러스트를 많이 볼 수 있었다. 익숙해서 호기심이 들었기에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전시가 너무 그 이미지만을 부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전시는 맥스 달튼을 누군가의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수식어로 한정 짓지 않는다. 맥스 달튼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그가 좋아하고 시도하고 있는 것들을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꾹꾹 담았다. 그래서일까, 좀 더 가볍고 가까운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은 이 작가를 나도 그런 수식어로 소개하고 싶지 않아졌다. 전시를 쭉 둘러보고 나왔을 때 나에게 맥스 달튼은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사람’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달세계 여행', 영화 모티프: 달세계 여행, 2019


맥스 달튼은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SF물을 좋아하는 공상과학 키드였는데, 그 취향의 흔적은 첫 번째 섹션에서 만나볼 수 있다. SF 영화의 기념비적인 장면을 담은 일러스트로 가득한 이곳에서 가장 처음 만나게 될 작품은, 한쪽 눈에 로켓이 꽂힌 달을 그린 ‘달세계 여행’에 대한 일러스트다. 이 영화는 조르주 밀리에스가 쥘 베른의 소설을 각색하여 제작한 것으로 SF영화의 시초로 여겨진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여러 장면을 합성하고 특수효과를 사용했던 최초의 영화이기도 하다.



'타디스', TV 시리즈 모티프 : 닥터 후, 2019


인간이 꿈꾸는 미래와 현실의 상황들이 오묘하게 중첩되어 있는 SF로 전시를 시작한 것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눈에 띄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 BBC 드라마 ‘닥터 후’에 나오는 타임머신 타디스다.


타디스는 Time And Relative Dimension In Space(시간과 상대적 차원의 공간)에서 따온 이름인데 주인공인 닥터는 타디스를 타고 시공간을 여행하며 인류를 구하곤 한다. 맥스 달튼의 일러스트 속에서 파란 공중 전화박스 타디스는 자신을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듯 거대한 푸른 숲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림에 쓰여 있는 문구처럼 타디스는 차원을 이동할 수 있기에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타디스 안으로 들어갔을 때가 훨씬 크다고 한다.


맥스 달튼의 그림은 이 타디스와 닮아있는 것 같다. 앞으로 만날 그의 영화 일러스트들은 타디스로 시공간의 차원을 이동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 영화를 봤던 때의 감각을 재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림의 구성은 한 동화책의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 영화 모티프 : 초콜릿 천국, 2017


'아멜리 풀랭의 멋진 운명', 영화 모티프 : 아멜리에, 2017


두 번째 섹션부터는 장르의 구분 없이 맥스 달튼이 사랑하며 작업했던 영화들이 전시되어 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 ‘오즈의 마법사’, ‘아멜리에’, ‘킹콩’ 등 익숙한 영화들 사이를 거닐다 보면 금방 맥스 달튼 특유의 재치가 눈에 보인다. 멈춰진 한 순간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영화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림. 그는 단 한 컷으로 영화의 이야기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일러스트들은 크고 길쭉한 건물을 배경으로 캐릭터들이 작게 배치되어 있다. 각자의 공간에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인물보다는 그들을 둘러싼 배경을 넓게 조망하게 되기 때문에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더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캐릭터들이 위치한 공간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일러스트는 일종의 건축 도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는 ‘기생충’ 일러스트 옆으로는 작업 과정이 담긴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데, 정말 그림을 건축처럼 하나하나 섬세히 쌓아 올린다는 인상이었다.



'기생충', 영화 모티프 : 기생충, 2021


캐릭터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상징하는 공간 속에 위치에 위치해있다. 그 영화를 좋아하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디테일들이 세심하게 그려져 있고, 무심한 표정으로 슬쩍 위트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은 자꾸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고 싶게 만든다. 몇 작품을 보고 바로 ‘월리를 찾아라’가 떠올랐는데 실제로 그것을 오마주한 작품도 있었다. 그만큼 깊숙이 들여다볼수록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공간에, 누가, 누구와 같이, 뭘 하고 있는지 관찰하는 순간 영화 속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먼저 할 일이 있다', 영화 모티프: 킬 빌, 2011


많은 작품을 지나며 눈을 감고 있는 캐릭터가 많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아무 일도 없는 척 능청스러운 그 표정들이 흥미롭다. 실제로 그들은 아주 많은 일들을 했을 텐데 말이다. 특히 ‘킬빌’을 그린 일러스트처럼 차분해 보이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작품은 오래 뜯어보게 된다.


결혼식이 있던 예배당 앞에서 무기를 하나씩 들고 조용히 눈을 감고 웃고 있는 캐릭터들과 핏빛 하늘, 비행기 그리고 피 묻은 웨딩 드레스를 입은 브라이드와 왼쪽 하단의 뱀 블랙맘바.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찬찬히 요소들을 되짚을수록 그림이 재미있어 질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캐릭터 일러스트


표정에 관해서 언급하고 싶은 또 다른 작품을 세 번째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빅팬이었던 맥스 달튼이 그의 영화 삽화에 참여하게 되었던 일러스트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 중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캐릭터 일러스트에 눈길이 간다.


화려한 호텔의 밤을 그린 작품 오른쪽으로 호텔과 관련한 주요 캐릭터의 일러스트가 배치되어 있다.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가운데 중간에 선 제로만이 오른쪽을 힐끗 바라보고 있다. 제로가 바라보고 있는 인물은 바로 그가 사랑했던 아가사다. 다 무너져가는 호텔을 운영하는 것이 아가사와 행복했던 때를 위해서라는 제로의 대사가 기억났을 때 그 배치가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작가가 직접 신경을 써 의도한 것이라고 들었다.


쭉 이어지는 전시에서도 자신의 작업들에 애정을 갖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공개되는 것이라던 화가의 작업실 시리즈와 동화책 삽화 작업, 영화를 모티프로 치밀하게 만들었다는 보드게임, 그리고 그가 존경하던 아티스트들의 LP 일러스트 커버도 만나볼 수 있다.


맥스 달튼에 대해 다양한 면모를 조명하려는 것을 보며 전체적으로 작가와 미술관이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눈으로 작품을 보고 있다면 귀로도 몰입할 수 있도록 영화의 OST를 같이 들을 수 있는 이벤트 기획을 한 것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맥스 달튼의 일러스트는 우러러보는 작품이 아니라 앞에 의자를 끌고 와서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게 한다. 그만큼 꾸며내는 것 없이 소박하게 영화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멋있지 않냐는 한 인터뷰를 읽으니 더 이해가 되었다. 그는 우리에 비해 간질거리는 손으로 대화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미 완벽한 결말로 끝난 영화를 다시 뒤적이는 것을 힘들어하는데, 더 이상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아는 허탈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맥스 달튼의 일러스트에서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멈춰진 그림 속에서 영원히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 세상은 우리의 현실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사라진 것이지만, 그 환상이 여전히 지켜지는 것처럼. 영화가 보여주는 환상에 푹 빠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전시는 꽤 매력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타디스를 타고 어디론가 다른 곳을 경험하고 싶은 것처럼, 아가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빛 바랜 호텔을 추억하는 것처럼.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어려워진 시기에 미술관에서 우리가 사랑했던 영화와 그 때 그 감정의 순간들과 다시금 조우해보는 것은 어떨까. 낯설지만 이미 잘 알고 있던 친구처럼 맥스 달튼과 함께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유대감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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