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 글을 쓰는가.
비교는 나쁜 거라고 배웠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꾸만 나의 마음은 상대방과 나의 성적, 인생, 삶의 기회들을 비교하며 때로는 활짝 개었다가 흙탕물처럼 흐려지곤 했다. 내가 상대방보다 A+가 하나라도 많으면 금세 기분이 좋아지고, 또 반대로 상대보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마음 깊은 곳에서 '졌다'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자꾸만 스스로를 다그치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점점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나의 열등감의 시작점을 짚어가면, 역시 고졸이라는 신분이 아닐까 싶다. 스무 살, 그 찬란한 어른의 초입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대학생이라는 어엿한 신분을 가지고 사회에 나설 때, 나에게 주어진 '직장인'이라는 신분은 생소하기만 했다.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SKY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계급도를 기반으로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한 많은 학생들을 상대적 박탈감에 빠트렸고, 계급도로 따지면 그 최하위에 위치한 고졸이라는 계급은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른이 된 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일을 못하면 '역시 고졸은~'하고 나의 출신을 들먹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함께 일하셨던 분들이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음에도, 회사 블라인드 어플을 보면 그 안에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혐오의 감정들이 가득했기에 나는 계속 의심하고, 불안해하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함께 입사한 고려대학교 언니가 일할 때 실수하는 걸 보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그런 스스로의 저열한 생각에 혐오감이 들었다.
왜 나는 이 길을 선택해서 스스로를 옭아매는지 하는 원망도 해보았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중학교 3학년 당시 상업고등학교 진학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었고, 그러므로 그에 대한 선택의 결과도 내가 책임지는 것이 합당했다. 원망할 대상도, 혐오할 대상도 그저 나였다. 까마득하게 어렸고 말랑했던 스무 살의 나는 남을 미워하는 것보다 나를 미워하는 게 쉬웠기에, 습관처럼 자기혐오를 일삼았다.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나날이 괴로웠고, 대학도 나오지 못한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부정적인 감정에 잠식당해 괴로울 때면 '나는 쓰레기야.' 하고 비탄 어린 자기혐오를 내뱉고 나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괴로움이 한도를 넘어설 것 같으면 통장을 보았다. 금융치료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의 돈이었지만 생각보다 자본주의의 단맛은 짜릿했고, 돈을 먼저 벌어서 좋은 점도 분명히 있었다.
부모님의 용돈을 받던 생활을 청산하고, 첫 월급의 일부를 용돈으로 드릴 때도, 동생이 먹고 싶어 하는 치킨을 사줄 때도, 내가 사고 싶었던 옷과 신발들을 자유로이 구매할 때도 참 좋았다. 항상 급식이나 집밥만 먹다가, 하루에 꼭 한 번은 신세계 강남점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았다. 뭔가 굉장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함께 만나는 중학교 친구들이 과잠을 입고 오거나, 과 MT에 참석해서 신나게 노는 사진들이 올라올 때, 친구의 신촌 캠퍼스를 구경하고 동아리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볼 때면, 저절로 나와는 다른 대학생의 삶을 동경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지금은 직장인이자 대학생으로 그 꿈을 이뤘지만, 여전히 여기에서도 '야간대'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같은 동문으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익명이라는 힘은 굉장하다. 자신의 속에 있는 생각이 올바른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익명의 힘을 빌려서 날것의 글을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간에 올린다.
그렇기에 가장 자유롭고, 그렇기에 가장 잔혹하다. 막연히 생각했던 '대학생은 대단할 거야'라는 나의 생각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에브리타임을 통해 배웠다. 다 같은 인간이고, 각자의 주어진 환경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텐데 자신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무시를 일삼는 언행이 당황스러웠다. 야간대학교만 무시하는 게 아니라 입시 전형들을 줄 세우며 그 안에서 '정시'로 들어온 사람들이 최고라고 찬양하는 그 작태가 우스웠다.
언제부터 이 비교가 시작되었을까? 아주 어린 시절에는 상대방의 조건이나, 환경이나, 상황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집 몇 평에 사는지 비교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비교의 대상이라면 극복하면 된다. 그러나 그 노력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어릴 때는 막연히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노력했다. 그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를 마음껏 미워하고, 혐오하며 열등감을 해소했다. 문제는 나라고, 내가 이상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남들이 하는 것, 보기에 좋은 것을 하고, 그것들을 인스타라는 전시장에 차곡차곡 진열하며 만족감을 느꼈다. 그 도파민에 가까운 감정은 일회성이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내 안에서 반짝이다가 사라졌다. 맛집을 가다가 다음에는 미슐랭을 가고, 남들이 하고 싶어 하는 경험을 누리겠다고 팝업도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인스타 스토리에 초밥 사진을 올리고, 다른 친구들의 스토리를 보다가 더 멋지고 좋은 곳에서 식사한 사진이 올라온 것을 보고 갑자기 나의 사진이 초라하게 느껴져서 삭제하고, 입맛이 뚝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갑자기 맛있던 초밥이 하나도 맛있지 않게 느껴졌다. 계급도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그 기준에 맞춰서 살고 있는 것은 나였다.
이제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꾸만 비교하고, 급을 나누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것도 지쳤다. '비교'하는 한 기준을 온전히 충족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준들에 맞추지 못한 내가 더 싫어졌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정작 내가 나를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는 게 못내 서러웠다.
이건 비교하지 않기 위한 나의 연습기록이다. 솔직하자고 다짐했기에, 나도 익명의 힘을 빌려 조금은 자유롭게 '내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내가 정말 뭘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하나씩 알아갈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비교할 순간은 분명히 올 것이겠지만, 그럴 때마다 이제는 나를 탓하고, 미워하기보다는 잠시 멈춰서 내가 원하는 가치인지,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너무나도 개인적인, 그리고 과정이기에 불완전한 글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