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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Jan 16. 2021

(불?)필요한 걱정.

사노라면 무언가에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곤 하는데 때론 지나칠 때도 있다. 해외의 어떤 심리학 분야의 저자가 정리하기를 대다수의 걱정은 절대 현실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거나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걱정 또는 지나치게 사소한 것에 대한 고민이기 때문에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 고민은 굳이 필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기' 나라의 어떤 사람이 안 해될 법한 시시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한다고 해서 유래한 말로 "기인우천" 줄여서 '기우'라 한다. 하늘이 무너져 세상이 없어지면 살 수 없음에 걱정하거나 해와 달이 떨어지면 어찌 될지를 걱정하고 때론 땅이 꺼져버리면 어쩌나 심히 고민했다는 옛날의 이야기에서 탄생한 고사성어인데 사실 요즘의 우리라고 다르지 않는다. 쓸데없는 걱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쩌면 우리 모두가 가끔은 열심히 하는 일 정도가 될 수 있고 사람에 따라서 그 고민이나 걱정에 특히 심하게 몰입할 때가 있을 뿐이다.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에 대한 다수의 책에서 인용한 그 연구결과를 참조로 하더라도 안 해도 될 걱정이나 생각에 잠겨 근심으로 가득 찬 채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고민거리가 될 수도 있다. 즐거운 상상이나 행복한 일을 떠올리며 기분 좋은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질 테니 바짝 긴장하며 게슴츠레 뜨고 있던 눈은 어느덧 여유가 가득해져 좀 더 유연한 생활이 가능해질지도 모르는데 조금만 더 깊게 생각을 한다면 우리의 일상에 무수히 많은 즐거움이 가득할 수 있다(그것을 행복이라 생각을 안 해서 그렇지).


물론 그 논리의 취지라면 격하게 공감한다. 결과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40%)이나, 스스로 바꿀 도리가 없는 일(4%)이나 아니면 너무나도 사소한 어쩌면 먼지 같은 걱정거리(22%)를 두고 애써 머리 싸매 걱정할 바에야 소소하지만 즐거운 상상, 이를테면 라면에 계란을 넣고는 싶은데 풀어서 넣을지 수란으로 만들어 넣을지에 대한 군침도는 상상. 또는 스프한개를 온전히 다 넣을지 아니면 백종원 선생님(난데없는 극 존칭. 이분은 우리에게 어디 나가서 주문해야만 맛볼 수 있던 '먹을만한 음식'의 가정 보급과 대중화에 힘쓰셨으므로 존경받아 마땅하다)의 조언대로 된장을 한 스푼 풀어 넣을지 그도 아니면 애초에 식용유 한 숟갈 둘러 만들어낸 파 기름에 고춧가루로 짬뽕 맛이 우러난 라면을 끓여낼지처럼 기분 좋은 상상만을 할 수도 있으니 쓸데없는 근심을 버리고 그 시간에 즐겁게 살자는 취지는 분명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즐거운 상상만 하며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 또는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의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불필요하게나마 남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미물의 차이이자 어쩌면 사람(탈을 쓴 사람 말고)만이 누릴 수 있는 쓸데없는 특권 아니겠나. 생각 외로 자주 우리는 너무나도 사소한 일에 대해 불필요한 걱정을 하며 살곤 하는데 과연 정말 그토록 쓸데없었을까?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경기도를 지나 서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온전히 가로질러 서해바다로 빠져나가는 한강은 우리나라 중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강인데 구간마다 차이야 있겠지만 보통은 폭이 1km 이상이다. 다리에 집입하고 진출할 때까지의 거리로 치면 다리의 길이는 2km가 되기도 한다. 젊어서 한때 한강 이남과 한강 이북을 매일같이 오가던 그 시절에는 아침에 건너가서 저녁에 건너올 때도 있었는데 별 일없으면 주로 걸어 다녔다. 그 목적이란 것은 상당히 복합적이었는데 부족한 시간 쪼개서 겸사겸사 알차게 운동으로 걷고 싶기도 했고 어느 날엔 멋진 경치를 만끽하려고도 했다. 그 경치라는 것이 한강 위에 펼쳐진 하늘이 유난히도 맑고 파랗게 보이는 날은 말도 안 될 정도로 멋지고, 해가 떨어지는 시간에 붉게 변한 강이나 가로등 불빛 환하게 길을 밝히는 한밤중이면 운치 있기도 하다. 물론 대학생 때의 일이므로 교통비를 절약해보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사실 본디의 목적이라면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그 당시가 어쩌면 살면서 결국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 주로 걱정하던 시기였을 것이다. 한강 다리 위 중간지점에 항상 낚시 의자 펼치고 무척이나 편한 자세로 등을 기대앉아 10m 이상 낚싯줄을 늘어뜨려 한강으로부터 물고기를 건져 올리던 어느 이름 모를 강태공의 신변을 걱정한 일화가 떠오른다. 섬나라인 일본에서 제작하는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거대 물고기가 등장해서 이 낚시꾼을 한강으로 끌어내려 강물 안으로 끌고 들어가면 어쩌나 와 같이 그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고 일어날 리 없는 일에 대한 근심이었다.


낚싯줄이 아무리 튼튼하며 끊어지지 않는다고 한들 성인을 끌고 갈 만큼 장력이나 그 인장강도가 대단할 수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 걱정은 쉽게 사그러 들지 않았다. 설령 사람 무게 정도 우습게 들어 올릴 만큼 대단히 강력한 낚싯줄이었다고 해도 사람을 끌고 갈 만큼 물고기의 끄는 힘이 강할 수는 없다. 더욱이 물고기가 그 강태공을 움직이게 하려면 가로(X)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 어마어마해야 할 텐데 한강 다리가 수면으로부터 거의 10m 정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낚싯줄은 거의 수직으로 떨어져 있을 테고 굳이 코사인 90도를 생각해 본다면 그 힘은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작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해서도 그렇게나 남 걱정을 하다 보니 분명 그 순간만큼은 이타적으로 된 나 자신을 발견했고 대략의 계산에 의해 실현되지 못할 일이라는 결론에 이른 그 순간은 나의 마음도 안도되었는데 나처럼 남 걱정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아직 살만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강 다리를 거닐어 본 사람이라면 공통의 감정을 느끼겠지만 순간적인 공포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어느 날은 제갈공명이 환생하여 소환한 것처럼 강한 동남풍이 부는 듯하고 또 다른 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 중 울돌목의 거센 바람처럼 꽤나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고 어쩔 때는 몸이 휘청하기도 한다(물론 달려오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지면과 마찰을 일으키는 노면음에 지레 겁먹고 헛디딘 것일 수도 있다). 비슷한 종류의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한 가지가 더 있었고,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다. 어느 날은 비행기 날개에 이를만한 거대한 우산을 들고 다리를 건너는 이름 모를 아주머니가 원인모를 돌풍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싶어 일어지 않을 일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했다.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생각해봐도 어린 시절의 그 상상은 물론 터무니없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생각이 정말 40%에 해당하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으로만 정의하려 한다면 왠지 모를 서운함이 감돈다. 그 당시 한강 다리 위에서 내 주변을 거닐던 누군가에게 혹시라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실제로 강물로 뛰어들지는 않아도 주변을 관찰하고 쓸데없는(?) 걱정을 종종 하던 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 빠르게 119든 112든 전화 한 통은 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고 타당한 추론이다. 조금 안 좋은 방향으로 상상을 한다면 스스로의 신변을 비관하려던 누군가가 다리 위에 서 있는 경우라면 평소에 그 쓸데없는 세상 걱정을 해본 누군가가 주변에 있었느냐 없느냐가 그 순간 중요하게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 힘으로 어찌 손쓸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해 걱정하며 사는 인생도 어쩌면 우리들의 삶인데 체념한 채로 꿀 먹은 벙어리 행세만 하며 기분 좋은 상상으로 애써 웃어넘기는 그 삶이 행복의 정석이 될 수는 없다. 물론 이 시대에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평민에게만 해당하는 일도 아닐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참조로 보면 태종에서 세종으로 넘어가려는 그즈음의 기록에서 4%에 해당하는 '어찌 힘쓸 도리가 없는 걱정'을 하던 양녕대군을 찾을 수 있다.


궁궐의 안보다는 밖을 더 좋아하던 양녕대군이 태종의 자중하라는 명을 거역하며 궁궐의 담을 다시 넘는 일화는 어찌 보면 인간적이다. '어찌 힘쓸 도리가 없는 걱정'에 대한 쓸데없는 고민하지 말고 그저 입 꾹 닫고 글이나 읽었더라면 태정태세의 노랫말이 태정태X로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의 네 번째 왕이 단명했다고 적혀있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왕이 되어서도 궁궐 밖의 세상만을 상상하며 불행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그 당시 양녕대군의 속마음을 누가 알겠냐마는 달리 생각해 본다면 불필요한 그 걱정을 평소에 해대며 많은 고민을 한 덕에 그는 스스로 인생을 원하는 대로 바꾼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한 고민이 4%를 차지하고,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도 4%인 이유가 어쩌면 서로 뒤바뀔 수도 있기 때문 아닐까.

오늘 아침은 날이 하도 따뜻해서 한강에 다녀왔는데 오랜만에 사소한 걱정 하나를 추가했다. 멀리서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마치 당장이라도 자전거 오가는 그 길로 뛰어들 채비를 하는 듯하여 바쁘게 구출(?)해주려고 뛰어가 보니 다행히 그 모습은 접근을 금지하기 위해 붙여둔 안전테이프의 일부가 남아 매달려 있던 모습이었다(물론 개구리는 겨울잠을 자기 때문에 일어날 수 없는 일에 해당된다). 그러던 중에 바로 앞의 강으로 눈을 돌려보니 이렇듯 얼음은 녹아있었고 그 녹은 얼음 사이로 나와 오리는 힘차게 헤엄치는 중이더라. 며칠 전 먹을 물이 모두 얼어붙은 바람에 그저 얼음을 핥아먹던 고양이 가족도 이제는 원 없이 물을 마실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는 불필요한 사소한 걱정을 해대며 살아간다. 많은 사례에서 분석된 것처럼 그 당시를 다시 떠올려 본다면 분명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고, 내 힘으로 바뀔 수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너무나도 사소해서 하나마나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을 향한 괜한 걱정으로부터 우리의 세상은 분명 조금은 더 따뜻해졌다. 그 불필요한 걱정과 생각을 한 번이라도 먼저 해 본 사람이 비슷한 일에 대해서도 곧잘 좋은 생각을 떠올리고 필요시 긴박하게 움직이게 마련 아니던가. 쓸데없이 해본 걱정이 정확히는 몰라도 누군가의 상황에서 100번 중 1번은 쓰임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이타적으로 해본 그 근심과 걱정 덕에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이렇듯 무던하게 유지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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