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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Jan 21. 2024

<나의 올드 오크> 역경을 극복하는 힘, 공동체와 연대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줄거리 및 리뷰


나의 올드 오크 줄거리


야라는 시리아 난민이다. 내전으로 복잡한 시리아를 떠나 영국의 폐광촌으로 이주하게 된다. 당연히 주민들은 못마땅하다. 자신들은 이미 오래전 비싼 돈을 주고 주택을 구매했는데 집값은 이미 1/5 이하로 떨어졌고 이들이 유입되면 더 떨어질 거라 생각한다. 난민이 런던 같은 대도시가 아닌 자신의 동네에 오는 것도 싫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외치는 정부와는 달리 실제로 이들이 살게 되는 건 이런 촌구석 동네이고 피해를 보는 것도 자신들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이에 분개한 시민 중 한 명은 야라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일부러 떨어뜨려 고장낸다. 그녀는 그 사람을 찾아가 카메라 수리비를 요청하지만 그는 거절한다. 그때 올드 오크라는 오래된 펍의 주인인 밸런타인이 자신의 옛 카메라를 처분한 값으로 카메라를 수리해주겠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라를 비롯한 난민들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그는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그들을 감싼다. 단순히 야라의 카메라 수리비를 지원해 준 것뿐 아니라 그들이 마을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매트리스, 자전거, 식료품 등을 아낌없이 지원한다.


하루는 마을에서 작은 운동회가 열린다. 그때 린다라는 어린아이가 갑작스레 어지럼증을 호소한다. 야라는 그녀를 데리고 집에 데려다준다. 당분이 필요하다는 린다의 말에 그녀의 집을 뒤지는데 린다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야라를 힐난하며 내쫓는다. 왜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려 하나 그런 변명을 할 시간도 주지 않는다. 이 사건 후 야라는 이 지역의 주민들과 자신을 비롯한 이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고 한다. 20년간 잠긴 채 쓰지 않던 올드 오크 뒷방을 그 공간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밸런타인은 친구들이 회의 장소로 뒷방을 쓰자고 했을 때도 반대했던지라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는다. 광산 노동 운동을 할 때 자신의 어머니가 그들에게 밥을 먹이며 단결했던 것처럼 함께 밥을 먹으며 연대하는 것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욕적으로 뒷방을 정리하고 수리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누구나 무료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과 이주민이 한데 어우러지며 이들은 원하는 바를 달성한다. 하지만 너무 오래된 공간이었던 탓인지 수도관이 터져  누수와 누전이 발생하며 이들의 연대 계획은 금세 무너져내리고 만다.


블루칼라를 넘어 난민의 시선으로


켄 로치 감독은 이른바 블루칼라의 노동자를 대변하는 작품들을 연달아 제작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미안해요 리키>와 이 작품을 묶어 3부작으로 소개하기도 하는데 앞에 두 작품이 블루칼라 노동자의 어려운 생활과 차가운 현실의 벽을 묘사하고 있다면, <나의 올드 오크>는 이역만리 땅으로 이주해 온 난민의 슬픔, 그리고 그들이 겪는 노골적인 차별에 대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시리아 사회에서 야라는 가족들과 영국으로 이주해온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정치범으로 몰려 수용소에 갇히게 되며 생이별을 해야 했다. 새로운 곳에서 제대로 정착하면 좋았으련만 난민을 바라보는 시선이 그리 곱진 않다. 그녀의 동생은 학교에서 이유도 없이 폭행 당해야 했고, 그녀 역시 선의를 베푼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들이 같은 영국인이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사건들을 겪어야 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난민이니까. 이유는 그뿐이다.


다행히 밸런타인을 비롯한 몇몇의 주민들은 그들을 돕는 데 열성이다. 물질적인 도움에서부터 마음을 달래주는 심리적 도움 역시 제공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있음에도 난민들은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 상황을 은유적으로 아주 잘 묘사한 장면이 있는데 처음 야라를 데리고 뒷방으로 데려갔을 때의 일이다. 자신의 오래된 카메라를 보여주려던 밸런타인의 뒤로 야라가 쫓는 형국인데 그녀의 모습 뒤로 규칙적인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사이렌은 치안을 유지하며 위급 상황을 대처하는 경찰 혹은 소방기관의 상징이다. 그런 소리가 야라의 뒤로 울렸다는 건 이 도시가 결코 평화롭지 않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물리적인 충돌, 혹은 위급한 상황과 마주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하는 부분이었다. 전쟁을 피해 도망쳐 온 이곳에도 결코 아름다운 세계는 기다리지 않았다. 노골적인 편견과 차별을 겪어야 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이들은 맞서야 했다. 밸런타인을 위시로 한 몇몇의 주민들이 도움의 손길을 보내기도 했지만 야라와 난민들이 겪은 어려움을 온전히 보살피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밸런타인과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이 조금씩 늘어나며 감독은 이들의 미래가 아주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는 듯했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연대의 힘으로


야라와 밸런타인이 주민들의 인식을 바꿔놓기 위해 택한 방법은 같이 밥을 먹는 장소를 만들고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인종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두 집단을 사이좋게 만들기란 결코 쉽지 않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그 시간이 인식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확신도 없다. 그럼에도 같이 밥을 먹는다는 건 그만큼 가까운 사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같이 이야기하는 시간을 늘리고 즐거운 활동을 할 수 있다면 분열된 이 마을의 분위기를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식구란 말이 떠올랐다. 식구는 한 집에서 함께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자어로도 食口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한 집에서 거주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함께 일을 같이 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는 말로도 변환될 수 있다. 즉 밥을 같이 먹는다는 의미는 아주 사적인 영역으로 상대를 끌어들이고 공동의 목표를 만들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는 너무나 배타적이다. 각자의 이익만을 좇을 뿐 타인을 위한 배려, 다양성을 존중하려는 태도 등이 결여되어 있다. 서로를 불신하고 자신의 편익만 주장하는 사이 도시는 크게 쇠퇴했고 주민들 간에는 따뜻한 정 보다 갈등만이 팽배해졌다.


이들이 예전부터 개인주의적 삶을 살았던 건 아니다. 이 마을 탄광 산업이 한창이던 20년 전에는 그 누구보다 끈끈하게 힘을 모으고 연대했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파업 노선을 두고 광부 사이에서 균열이 발생했고 파업 참여 여부를 놓고 첨예하게 갈등했던 것이 무색하게 몇 년 뒤 국가 차원에서 광산을 폐광시키며 이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이 싹튼다. 그렇게 서로를 믿고 의지한 결과가 폐광이라는 처참한 현실이었으니 이들이 공동체의 염증을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커다란 갈등을 매듭지을 수 있는 건 개개인이 아닌 커다란 공동체였다. 서로를 헐뜯기 위해 시간을 죽여왔던 이들은 상대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뒷방을 함께 정리하고 함께 음식을 준비한다. 작은 움직임일 수 있지만 개인으로 계속 있었다면 결코 오가지 않았을 대화가 이들 사이에 생겨난다. 그리고 나니 인종의 차이, 종교의 차이 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걸 발견한다. 야라의 부고 소식을 듣고 밸런타인과 몇몇만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듯했으나 얼마 뒤 엄청난 숫자의 주민들이 모여 함께 아픔을 나눈다. 야라는 아버지를 잃는 힘든 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개인이 아닌 공동체로 결집한 이 공간에서 커다란 위로를 받는다. 이는 공동체만이 가진 끈끈함 힘이자 연대를 통해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였다.


반려견 마라를 통해 보여준 난민과 기득권


밸런타인은 아내와 이혼 후 아들과도 만나지 못한다. 무력감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에게 '마라'라는 이름의 강아지가 찾아온다. 바닷가에서 그를 발견하고 밸런타인은 자신의 아이처럼 이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 산책을 하다 그는 마을 청년들이 기르는 맹견을 보고 말다툼을 했다. 커다란 개에 끌려다니다시피 할 지경인데 입마개 같은 안전장치도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들은 자신의 개는 물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이 불안한 장면은 이후 등장할 불행한 사건의 서막이었다. 부모님의 묘지를 찾았던 밸런타인은 마라에게서 잠시 시선을 놓치는데 이때 청년들이 기르던 개가 마라를 물어 죽이게 된다. 그는 소리쳐 청년들을 비난했지만 그들은 꽁무니 빠지게 도망칠 뿐 어떤 사과도 하지 않는다. 단순히 반려견의 죽음, 부도덕한 청년들의 행동으로 사건을 해석할 수도 있지만 영화에서 제시되는 상황들을 통해, 이 사건이 숨겨둔 메타포를 읽어낼 수 있었다.


그의 작은 강아지는 어두운색 강아지다. 반면 그 강아지를 물어 죽인 개는 흰색이다. 이는 기득권층으로 묘사되는 백인과 사회적 약자가 되는 유색인종의 체급 차이를 보여준 부분이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백인이 기득권을 가진 건 아니지만 남반구와 북반구의 경제 수준 차이, 제3세계를 구성하는 국가들과 그들의 인종을 비교해 볼 때 이는 전반적인 생활 수준 차이와 경제적 수준 차이를 개의 크기와 색깔로 구분해둔 듯했다. 개를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는 청년들은 개발도상국 지원에 인색한 선진국 정부의 모습을, 무력하게 마라의 죽음을 바라보는 밸런타인은 자신들의 빈곤함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제3세계 국민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소시민과 켄 로치


켄 로치 감독은 우리나라 나이로는 90세에 가까울 정도의 나이다. 이 작품이 그의 은퇴작이 될 거라는 것은 물리적 수명의 한계를 고려할 때 당연한 수순으로 보인다. 그가 이전 작품들에서 노동자에게 보내는 따스한 시선과는 별개로 날카로운 사회 비판을 하던 것과 달리 이 작품에서 악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식 나눔 행사를 방해하려던 밸런타인의 옛 친구들을 악인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들은 악인이 아닌 우유부단한 인물일 뿐이다. 나이가 들 만큼 들어서 변화에 즉각적인 대응이 어렵고, 새롭게 맞이한 이웃이 어떤 파고를 만들어낼지 모르는 불안감에 벌벌 떠는 심약한 소시민인 것이다.


그들의 행동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폭력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부분까지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진 불안감이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잘못 표출되었을 뿐이었다. 감독도 그들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다. 위에서 말한 기득권의 국가에서도 소외받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이들에게도 적절한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걸 감독은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왜 자신들은 자전거를 지원받지 못하냐며 볼멘소리를 내뱉던 아이들의 이야기가 그러했고 어지럼증을 호소한 린다의 집에 음식다운 음식 하나 없다는 것도 그러했다.


다만 이 작품에서 노감독의 표현은 냉철한 비판보다 절절한 호소에 가깝다.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공동체의 힘으로 이겨내길, 소외되는 사람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끈끈한 연대를 가진 사회로 나아가길 바라는 호소가 말이다. 별로 세련된 방법은 아니다. 마치 하나의 공익 캠페인처럼 모든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 같은 메시지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남기는 마지막 작품이라면 그 호소도 이해할 수 있다. 사회 비판으로 더 나은 메시지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초로의 노감독은 그토록 바랐던 세상 모습을 한 번쯤 그려보고 싶던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의 결말이 다소 뭉특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절절히 감정이 느껴졌던 건 감독이 오랜 기간 영화를 만들며 보내고자 했던 메시지가 겹쳐 보인 탓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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